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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칼럼] 우리의 저녁시간을 되찾을 해법은?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22.01.17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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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 노무법인 벽성 대표

2021년은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역사적인 해였다.
그러나 지금의 화려함 뒤에는 전쟁으로 초토화된 50년대 황무지에서 시작된 70년간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기준들은 다양하지만 결국 국민들 ‘삶의 질’로 연결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선진국 진입은 우리 삶을 얼마나 바꿨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진국 문턱을 넘었을 뿐 우리사회는 그리 행복하지 않다.
사람들은 여전히 OECD 평균 수준을 훌쩍 넘는 장시간 노동을 하며 산다.
OECD 통계에 들기 시작한 2008년 당시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2,228 시간이었다.

OECD 평균인 1,787시간에서 450시간이나 초과한 혹독한 노동이다.
2018년이 되어서야 1,993시간으로 떨어졌지만, 여전히 1,908시간을 노동(2020년 현재)하며 OECD 평균치(1,687시간)보다 220시간을 더 일한다(2021 해외노동통계, 노동연구원).
유럽의 나라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주 30시간대, 주 4일제로 나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이제야 주 40시간제(연장근로 포함 52시간)를 간신히 정착시키는 중이다.
그러나 그 마저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퇴행적 인식이 곳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산업 현장에서는 세상을 채 배우지도 못한 어린 청년들이 잔인할 만큼 비참하게 죽어 나가지만 무심할 만큼 사고는 반복되고 있다.
생명을 담보한 난폭 운전으로 유지되는 배달노동들이 속수무책 증가하고, 원·하청으로 계급화 된 인간 노동은 비용절감 수단이 된지 오래다.

게다가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별다른 대안도 없이 법 밖의 존재인 양 노동법 적용이 제외되는 나라다.
청년들의 암울한 삶은 높은 청년 자살률로 나타나고, OECD 노인 빈곤율 1위는 노인 자살률 1위와 함께 굳건하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생존 현실,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는 그렇다.

우리는 불평등 구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세계 불평등 연구소’는 한국의 소득 수준이 서유럽 대표 국가들과 비등하지만 불평등은 훨씬 심각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OECD 2021 불평등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소득 격차의 원인에 대한 설문(중복응답)에서 '부모의 부'라고 답한 응답 비중이 46%로 OECD 평균(26%)보다 월등히 높은 동시에, 노력(근면)이라고 답한 비중도 OECD 평균(74%)보다 훨씬 높은 86%로 나타났다(한겨레, 2021.12.8).
말하자면 불평등 문제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대응 사이에서 상당한 인식의 불일치를 겪고 있는 셈이다.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정부의 공공성 수행 능력과 맞닿아 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의 ‘조세와 소득이전 적용 이전’의 소득 불평등도는 0.402로 OECD 선진국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양호한 펀이었다(프랑스 0.529, 독일 0.494, 일본 0.501, 영국 0.505).

그러나 ‘조세와 소득이전 적용 이후’의 불평등도를 보면 0.345로 이들 나라들 수준보다 오히려 역전 현상을 보인다(프랑스 0.301, 독일 0.289, 일본 0.334, 영국 0.366)(2021 해외노동통계, 노동연구원).
즉 한국보다 불평등 정도가 심했던 다른 국가들이 조세 및 소득이전 정책을 통해 불평등 구조를 상당히 개선하는 동안(각각 0.228, 0.205, 0.167, 0.139 개선), 한국은 0.057의 수준에 그치면서 불평등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연령대별 소득불평도’와 ‘상대빈곤율(시장소득 기준 중위소득 50% 미만 가구비중)’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국가가 불평등 구조를 개선해내지 못하면서 부담이 고스란히 개인에게 떠넘겨지는 셈이다.
불평등 개선에 대한 사회적, 공동체적 노력보다는 신자유주의적 방식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 구조다.
결국 ‘부모의 부’가 출발선에서 기회의 평등을 왜곡한다고 인식하지만 이를 개인의 노력으로 감당해야 하는 구조이니 중압감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와 스트레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선진국으로 진입했지만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은 이유다.

이처럼 한 나라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는 일은 개인들 노력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철근 구조가 휘어지고 있는 건물에서 아직 무너지지 않은 반대편으로 몰려 서로 자리싸움을 한들 결국 그 건물에서 안전할 사람이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세대간, 젠더간, 집단간 공정성 논쟁을 보면 무너져 내리는 건물 내에서 벌어지는 몸부림과도 같다.

능력주의, 공정 경쟁의 허구

자본주의 역사에서 기술의 발전은 생산력 향상의 근원이었다.
이제 인간은 기술 기반이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 기반이 된 그 기술력은 누구의 것일까? 산업화 초기 자본의 축적 과정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인간 노동의 착취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굳이 상기할 필요가 없다.

당시의 엄청난 착취에서 5세 이하의 어린이 노동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런 살인적 노동은 때로 인간 수명을 20~30년이라는 기형적 수준으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인클로저 운동 당시 지주들이 말뚝을 박고 소유권을 주장했던 것처럼 지금의 기술력도 먼저 선점해 실용화한 자본의 소유여야 할까?

서구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시간 감축의 과정은 생명 연장을 위한 투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어진 수명을 누릴 당연한 권리를 위해 엄청난 피의 희생이 따랐다는 사실은, 압축적 성장을 이룬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처럼 지금의 기술자본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인류의 피와 노력이 쌓아온 결과이자 역사다.
그러나 그 결과의 재분배 정책에 실패한 우리는 다시 세계의 이목을 끌 만큼 극심한 불평등 구조에서 허덕이고 있다.

불평등 보고서에서처럼 우리사회는 출발선의 불평등을 딛고 열심히 노력해야 함은 물론 결과의 책임까지도 온전히 개인이 떠안는 것이 정당한 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분위기는 우리사회의 심각한 불평등 구조에서 나온다.
이미 2018년 현대경제연구원의 연구 보고서에서도 우리나라의 빈곤탈출률은 19.5%로 심각한 수준임을 내놓은 바 있다.
이는 OECD 회원국 28개 대상 국가 중 하위였으며 회원국 평균인 64.1%의 1/3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처럼 부당한 규칙에 저항하기조차 어려운 정도의 사회로 이행되면 삶은 모두가 죽어야 내가 사는 오징어 게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양극화 사회에서는 본질과 괴리된 공정성 논란도 더욱 기승을 부리기 마련이다.
불공정 사회에 이르게 된 정치, 경제, 문화적 권력과 세습 구조가 무시된 채 지극히 말초적 수준으로 단순화되고 극단적으로 도식화되기 때문이다.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위험하게 일하라고 한 적이 없다’라거나 노동자들이 롤러에 끼어 사망한 사고에 대해서도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은 노동자 개인 책임론으로 돌리는 어이없는 단순함이 단적인 예다.

세계적 수준의 높은 산업재해율과 사고들이 개인들 책임 범위라면 국가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젊은 라이더들이 길거리에서 죽음을 각오한 속도경쟁으로 내몰리는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안전한 사회로 나갈 수 없다.

성장의 교리 대신 저녁시간 되찾기는 어떨까?

이처럼 우리는 개인들 희생엔 무심한 채 성장 만능이라는 교리에 기대 살아왔다.
인류가 이뤄낸 그 훌륭한 생산능력에도 여전히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개인들 생존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된 환경 재앙 앞에서 성장은 제동이 걸렸다.
이제 성장 논리대로 인류에겐 소멸의 과정만이 남게 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풍요의 상징인 고도의 생산력 사회에서도 여전히 경쟁만이 살 길이라면 나눌 몫이 지속적으로 누수 되고 있다는 의미다.
근본적인 문제는 생산물의 분배 구조에 있는데 이런 구조를 은폐한 채 성장만이 유일한 해법인양 호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성장만능의 잘못된 구조를 교정해갈 차례다.

그러나 이 고질적인 성장 논리를 쉽게 넘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자본주의 역사만큼 자본에 종속되어온 삶의 구조에 있다. 저녁 먹을 시간까지 통째로 바쳐가며 벌어들였어도 언제나 우리에게 부족한 건 돈이었다.

요리, 인간적 교류, 가정 내에서의 따뜻한 돌봄과 같은 중요한 생존 활동까지도 다시 자본으로부터 고비용으로 사들여야 하는 구조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시간이 줄어 지금보다 여유로운 삶이 가능해진다면 어떨까?
생존비용은 그만큼 줄게 되고 돈을 벌기 위한 경쟁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의미다.

경쟁사회란 인류의 삶을 철저히 개인화하는 과정에서 유지된다.
공유하는 삶의 효율성과 가치를 자본의 논리로 철저히 해체시켜 산업화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을 자본에 내맡기면서 지불하는 비용을 벌기 위해 더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면 경쟁구도는 조금씩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권력'의 들러리 아닌 진짜 '정치'에 관심 가질 때

보고서 결과처럼 우리는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면서도 경쟁주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우리 삶을 규정해온 모든 관습과 문화, 기술, 제도, 법체계는 인류의 오랜 삶이 누적되고 변화, 발전하면서 이뤄낸 공동의 결정체였다.

생명으로 태어난 누구도 지금의 인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처럼 인류가 살아온 삶의 역사는 대단히 입체적이고 누적적이지만 능력주의는 그 역사성을 무시한 채 드러난 평면만을 부각해 유포시킨다.
결코 공정해질 수 없는 토대에서의 공정성 논쟁은 우리사회를 더욱 해체시키는 길로 인도할 뿐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에서,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제 소수의 권력 싸움일 뿐인 위장된 가짜 정치를 버리고 진짜 정치에 관심을 갖자.
스스로 이익집단이 되어 불평등 구조를 강화해 온 정치권력에 대한 집착도 놓아 버리자.
그리고 권력을 재생산하는 진영 논리에 기대는 대신 우리의 일상이 나아질 생활정치를 시작하자.

우리의 삶을 개선해 나갈 실험들은 권력자가 대신 해줄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들이 행복해질 정책들을 사안별로 지지하고 연대하면서 ‘삶의 질’이 개선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삶의 정치 아닐까?
2022년엔 그런 삶의 정치 무대가 확대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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