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신문사소개 홈 > 안내데스크 > 신문사소개
"동호지필의 본보기 될 것…"

동호지필(董狐之筆)의 뜻은 정직한 기록 즉 기록을 맡은 이가 직필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적어 역사에 남긴다는 뜻입니다.

유래를 보면‘역사’의 생명은 엄정한 기술에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와 중국은 예로부터 사관(史官)을 두되 보호하였으며 그들이 쓴 사초(史草)는 설사 제왕일지라도 열람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았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의 영공(靈公)은 폭군이었다.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 궁중의 담을 장식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누대(樓臺)에서 잔치를 벌여 사람을 던져 죽이는 것을 즐겼다. 또 궁중 주방장이 웅장(熊掌·곰 발바닥)을 좀 덜 삶았다고 난도질해 죽였다.

참다못한 승상 조순(趙盾)이 수차 간언했지만 오히려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계획을 바꿔 주연에 초대하여 복병이 덮쳐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 때 호위병 하나가 막아서는 바람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옛날 사냥을 나갔을 때 사흘을 굶어 신음하던 청년을 구해 준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영공의 호위병이 되어 그를 막아준 것이었다. 이 틈을 타 그는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영공의 포악함이 날로 더해가자, 마침내 조천(趙穿)은 영공을 죽이고 마는데 조순의 사촌 동생이었다.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던 조순은 잠시 국경 부근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자 당시 사관이었던 동호(董狐)는 사책(史)에다 ‘조순이 국왕을 시해했다.’고 적었다.

놀란 조순이 극구 변명하자 동호가 말했다. “국난 중에 승상의 몸으로 도망간 것만 해도 잘못인데 돌아와 역적을 다스리지도 않았으니 시해(弑害)의 장본인은 당신이 아니고 누구겠소?

훗날 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했다. 조선자(趙宣子:조순)도 훌륭한 대 신이었다. 법을 바로잡기 위해 오명을 감수했다. 국경을 넘어 외국에 있었더라면 책임은 면했을 텐데……."

이때부터 동호(董狐)는 사관(史官)의 대명사가 되었고, 동호지필(董狐之筆)이란 ‘董狐의 筆法’, 즉 역사를 기술하되 권세 따위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22대 정조는 임금이 된 후에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이 권력의 중심에 포진해있어 이들을 함부로 내치지 못하였으나, 채제공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며 이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 후 화성(수원)을 축조하고 친위부대인 장용영 등을 배치하자 노론이 크게 겁내 이를 공격하자, 영의정 채제공이 노론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을 가려보자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고, 이 상소 전면에 동호지필이라는 네 글자를 내세운 사실은 유명하다.

이처럼 시사코리아저널도 권력에 굴하지 않고 시대의 목소리와 진실을 반영하여 추상같은 진실만 기록하는 동호지필(董狐之筆)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경영/총괄국장 임춘호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