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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철 칼럼] 네오직접민주주의 시대를 생각한다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21.12.0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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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철 /직접민주주의마을공화국 전국민회 상임의장

 21대 대선후보들의 윤곽이 잡혔다. 앞으로 100개월 남은 기간 동안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기겠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소적이다. 후보들에 대한 긍정 평가보다는 부정평가가 훨씬 높은 편이다.

예년 선거와 달리 특별한 것은 청년들의 마음이다.
지난 4.7 서울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응징 투표를 한 2030세대들의 마음은 어떠한 마음일까?
이승만정권 이후 2030이 민주개혁진보를 외면하고 대놓고 보수를 지지한 적이 있었는가? 없다.

한국의 청년들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올해 4.7보궐선거에서 2~30대들은 국민의힘당에 투표했다.
좋아서 투표했을까? 아니다. 기득권화된 더불어민주당에 응징투표를 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G7국가반열로 올라섰을 정도로 지표상으로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살고 싶지 않은, 죽고 싶은 나라1위(자살율 1위)와 애 낳고 살기 싫은 나라 1위(저출산율1위)다.

헬조선신양반제사회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2030세대들에게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정부는 “그들(좌우기득권세력들)만의 리그에서의 패권놀음”인 검찰개혁에만 정진할 뿐 심각한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 노력은 하지 않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정규직 접근과 부동산 접근 그리고 금융접근을 위한 진입 사다리를 반복적으로 걷어차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말은 민주투사정권이고 촛불혁명정부라 하지만 하는 짓은 돈과 권력 명예를 탐하며 심지어 인기까지 차지하려는 모습에서 가치농단의 민낯을 보았을 것이다.
짝퉁 민주투사의 위선과 가식을 보이면서도 “국힘당보다는 낫지않느냐?”라며, 최악보다 차악이 낫다는 혹세무민 프레임에 의지하는 것으로 정치적 우위를 누리려는 안이함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30세대들은 희망의 사다리를 연거푸 걷어차는 모습에서 국민의힘당과 더불어민주당과의 차별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내로남불과 위선적인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고개를 돌려버리게 했다.

촛불시민들은 촛불시민혁명이야말로 촛불시민과 더불어민주당의 합작품이기에 공동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촛불시민세력들이 이를 받아안을 준비역량 부족과 급박한 정세로 인하여 촛불정신과 문제의식 실현을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정부에 위임했다.

그렇지만 촛불정신과 문제의식은 점차 흐려져갔고 정개련(정치개혁시민연합)사태에서 보듯이 시민사회의 진정성마저 걷어차는 오만방자함을 보이며 민심을 잃었다.
급기야는 4.7보선에서 참패하기에 이르렀다.
권력을 양도한 것이 아니라 위임을 했으면 위임행위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때 소환을 해야 한다. 하지만 촛불시민세력에게는 직접민주주의제도인 국민소환의 권리가 없음으로 허공에 대고 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지금 한국은 정치경험이 전혀없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야권의 대권후보로 선출되었고, 36세의 젊은 정치인 이준석이 제1야당인 국민의힘 당대표가 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이들이 롱런을 하느냐 안하느냐는 별개로 이러한 현상은 현재 한국인들은 한국판 마크롱을 갈망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2016년 4월 6일 프랑스의 마크롱은 프랑스국민들이 기득권화된 좌우파정당에 염증을 느끼는 상황에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자유주의자 정당 앙 마르슈(En Marche)전진)정당을 창당했다.
이당은 다음해 중도좌우파 유권자의 대안으로 부상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집권했다.
프랑스는 2017년 대선에서 국회의원 한 명도 보유하지 못한 에마뉴에르 마크롱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함으로서 정치권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서로간의 이권다툼에 혈안이 되어있던 기존정당들은 위기의식을 느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 쇄신을 모색했다.

프랑스의 마크롱정부와 한국의 정치

마크롱은 정치의 고질화된 악습을 타파하기 위해 국회의원 후보들을 인터넷상으로 신청받은 후 선별함으로써 기존정치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부요직 인사들도 나눠먹기식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경험들을 쌓은 진짜 인재들을 찾아 기용함으로써 기존정치와 180도 다르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마크롱의 앙마르슈(전진)정당은 중도좌우파연합이지만 중도우파 헤게모니 자유주의정당으로서 해고와 고용을 쉽게하는 노동개혁과 친기업정책을 실행했다.
그러나 이에 항의하는 노란조끼운동의 연속시위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이에 대해 마크롱 대통령은 엘리트계층과 좌우기득권카르텔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 분출에 대한 대책의 하나로 80명 정원의 소수정예특수대학원 ENA(국립행정학교)를 폐교했다.
이 학교는 프랑스대통령을 4명이나 배출했고 권력과 자본을 독과점해왔던 프랑스의 명실상부한 정관재계(政官財界) 기득권 카르텔이었다.

머잖아 해를 넘기면 한국은 20대 대선을 맞이한다.
어느 당이 집권할지 모른다.
만약의 경우 이때 한국도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프랑스 마크롱의 앙마르슈같은 정당을 만들어 집권하거나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군소정당들을 국민들이 화끈하게 밀어주면 정치의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아닐 것이다.
정치의 근본문제라는 시각에서 한 번 살펴보자.

근대정당이 생긴 이래 좌우파정당 모두 민주주의를 통치(대의제 정치+관치)차원에서 이해해왔다.
우파 정당들은 국민의 대변자와 옹호자를 자처하면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은 국민대중 전체의 이익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소수 자산계급의 이익으로 귀결되었다.

이 사실을 직시한 진보적인 사람들은 좌파정당을 구성하여 민중(서민대중)을 이끄는 전위이자 옹호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런데 좌파정당이 이렇다 해서 정당의 기본성격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좌파는 대의 그 자체가 문제라고 보기보다 민중(서민대중)의 근본이익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대의가 문제라고 보았다.
그 대안으로서 혁명정당, 노동당, 공산당 등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대의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좌파 대안세력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득권화되고 우파의 거울 이미지를 따라 하는 행태를 보임으로써 우파정당과의 변별력을 크게 갖지 못했다.
그 이유는 좌파 대안정당들도 정치적 대의 정당의 창당과 집권의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민주주의는 좌우파 모두에서 통치 차원의 문제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이 우파정당이든 좌파정당이든 대의민주주의 정당들의 대의정치와 관치(官治)로 이루어지는 ‘통치(統治)’가지고는 정치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를 맞고 있다.
왜냐하면 이제 시민과 국민들은 스스로 자기통치하는 직접민주주의 민치(民治)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제4차산업혁명시대의 인류는 읍면동 단위의 마을공화국건설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주민자치와 광역단위와 전국단위에서의 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민주주의 시민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직접민주주의 주민자치’와 ‘직접민주주의 시민정치’ 그리고 ‘숙의민주주의 공론정치’를 동시병행적으로 할 수 있는 네오직접민주주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대의민주주의 통치헌법 기반의 ‘통치(統治)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 직접민주주의세력들의 시민정치와 주민자치로 이루어지는 ‘민치(民治)시대’로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촛불시민,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할 것인가?

그러면 민치(民治)시대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것은 촛불시민정치세력이 대안적 사고를 정립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대안적 사고를 정립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관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는 곧 대의민주주의라는 허구의 등식에서 벗어나 직접+숙의+대의+공화주의가 어우러진 융합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를 기반으로 시민헌법체제(민치헌법체제)가 구현될 때 명실상부할 것인데, 이는 추첨제와 선출제의 양원제, 시민배심제, 자치경찰제등을 구성내용으로 해야할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직접민주주의’이다.
우리한국이 벤치마킹해볼 나라는 스위스다. 스위스가 실시하는 직접민주주의제도의 주요내용은 ①선거권자 10만 명이 국민발의하면 국민투표로 시민입법(년중4회) ②국회와 행정부가 통과시킨 부당한 법에 대하여 5만명 이상 발의로 검증투표(검증투표로 36%폐기) ③지자체예산 약 100억 원 이상일 때 주민투표 등이다.

스위스는 전술한 ‘직접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직접 민주제와 대의민주제의 융합민주주의로 부당통과법안과 기득권 담합으로 인한 미처리법안에 대하여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국민발안’으로 시민입법을 하며 국민소환까지 실행하고 있다.
스위스는 국민소득 6만 달러 대의 고소득 국가이면서도 조세 부담률은 스웨덴의 60% 수준인 27% 선인데 국가경쟁력은 초일류이다.
스위스는 직접민주제 실행과 경제성과의 우수성(경쟁력)은 비례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래서 ‘스위스가 직접민주주의를 만든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가 스위스를 만든 것’이라는 것이 정치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둘째는 네오 직접민주주의정치관이다.
민주주의 최소 시민권은 대의민주주의하에서 수동적으로 투표에 참여하는 것이고, 최대시민권은 대안적 시민결사체를 만들어 주민자치와 시민정치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네오직접민주주의는 최대시민권주의로서 ‘직접민주주의 주민자치’와 ‘직접민주주의 시민정치’ 그리고 ‘숙의민주주의 공론정치’를 동시병행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핀란드에서는 5만 명의 전자서명이 있으면 일반시민들도 법안을 발의하고 법 개정을 요구할 수 있다.
또 '오픈미니스토리'라는 사이트를 통해 전자서명이 가능하도록 했고, '음주운전 가해자 가중처벌법안'이 회부되기도 했다.

오프라인 직접민주주의는 읍면동단위에서 마을공화국(마을자치정부와 마을기금 그리고 마을代學園)건설을 통한 주민자치에서 구현된다.
디지털 직접민주주의는 전국단위에서 국민발안.국민소환.국민투표.시민배심 등을 통한 시민정치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될 수 있게 해준다.
‘지역공동체앱’과 ‘불록체인기반’ 실시간 직접민주주의 투표플랫폼(M-voting) 그리고 독과점화된 플랫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부상하는 프로토콜경제(디지털 사회적 경제)는 디지털 직접민주주의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이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문제가 닥쳤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앞으로 더욱 우리의 일상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지역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전염병과 홍수, 가뭄, 산불, 태풍 같은 기후재난이 올 때,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혼자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공동체가 협력하며 더 수평적으로 분산된 새로운 자치기반 협치가 요구되므로 ‘피어어셈블리(peer assembly·참여자가 동일한 자격을 갖는 동배(同輩)의회)’가 바람직할 것이다.
세계 여러 지역에서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회 기관과 단체들이 정부와 손잡고 모이는 피어어셈블리가 표준화되어가고 있는데, 이는 특히 유럽 그린뉴딜의 중심에서 작동되는 시스템이다.
피어어셈블리와 쌍을 이루는 ‘우리 모두의 의회’라는 의미의 ‘피어민주주의’는 미국의 시민배심원 제도처럼 모든 성인이 일정 기간 잠깐씩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정부가 관리하지만 거버넌스체제이므로 전체 커뮤니티가 자신들의 미래에 관여할 수 있는 구조이다.

세 번째로 민치헌법에 의거한 시민헌법체제관이다.
지금까지의 한국의 헌법은 대의민주의에 바탕한 통치헌법체제였다.
제헌의회의 헌법은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가 융합된 민치헌법체제(시민헌법체제)의 꼴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러나 이승만정권은 직접민주주의와 시민헌법체제를 훼절시키며 장기독재의 길을 걸어갔다.
이후 이승만정권은 4.19혁명에 의하여 철퇴를 맞았고 한국은 다시 직접민주주의와 시민헌법체제는 복원되는 듯 했으나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다시 짓밟혔다.

87년 6월 시민대항쟁으로 인하여 박정희.전두환에 이르는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간정부가 들어서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절차적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안착되었고, 한국은 아시아 민주주의 모범국 소리를 듣고 있는 상황이다.
경제적으로는 G7국가의 일원이 되는 등 국가는 부강해졌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세력의 불철저한 민주주의 의식으로 인하여 반민주주의세력들에게 빼앗긴 직접민주주의 시민헌법체제는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복원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실질적인 경제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수도권 초과밀화와 1:9:90%의 격심한 양극화사회 그리고 저출산 자살율 1위의 행복하지 않은 위험사회 증후군을 앓고 있다.
사회적 우정이 부재하고 마을공동체가 해체되면 사회는 각자도생 모래알 사회가 되어버리고 자본과 권력만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10%의 좌우기득권에게는 그야말로 살기좋은 천국일 수 있다.
그러나 서민대중과 장애인.노인 등 사회적 약자 그리고 청년들은 행복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결의 돌파구를 대의민주주의 통치세력에 기대한다는 것은 나무 위에서 물고기를 찾는 연목구어의 행위와도 같다.
그러므로 직접민주주의 개헌을 위한 국민행동으로 통치헌법이 아닌 민치헌법을 제정하는 일을 더이상 미뤄서는 안된다.
민치헌법 제정을 통하여 직접.숙의.대의.공화주의가 어우러진 제대로된 진짜민주주의에 바탕한 시민헌법체제를 만드는 일에 나서야 한다.

네 번째로 제도정치와 시민정치의 병행적 투트랙 민주주의정치관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민주화운동 등 초일류의 사회운동을 자랑한다.
하지만 정작 정치는 3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이는 사회운동이 민주화 이후 정치를 개혁하는 데는 실패해 왔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사회운동의 정치 제도화 실패와 죽쒀서 개주는 식의 정치의 배반은 촛불시민혁명 이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더 이상 대의제 정치에 업혀가거나 민주진보진영 내 대의정치세력이 어려움에 빠지면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나서는 뺨이나 맞는, 지난 4.15총선 직전 시기 정개련 사태 같은 행위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정치를 일류정치로 레벨업 시키고 더 이상 배반의 정치가 반복되지 않게 하려면 민주진보진영 내 병행적인 투트랙 민주주의정치관이 필요하다.
이는 ①대의민주제적 ‘제도정치’와 네오직접민주제적 ‘시민정치’의 병행적 구동과 상호견제&균형전략 ②위로부터의 톱다운적 ‘대의정치’와 아래로부터의 버텀업적인 ‘시민정치’간의 경쟁동맹전략 ③대의정치인재(전문가중심)와 시민정치인재(현장중심)간의 상호견제와 협업전략을 필요로 한다.

다섯 번째로 제대로 된 포퓰리즘(민중주의)관이다. 제대로 된 포퓰리즘(a sane Populism)은 정치의 다중(多衆)과 경제의 민중(서민대중)의 이중적 구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포퓰리즘적 다중(민중적 다중)은 정치공간인 폴리스(Polis)에서는 자유를 추구하고, 경제공간인 오이코스(Oikos)에서는 평등(서민대중의 근본이익 옹호실현)을 추구한다.
더 나아가 제대로 된 포퓰리즘은 민중당파성의 정치와 녹색정치의 융합을 필요조건으로 하고, 숙의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공화주의가 어우러진 ‘제대로 된 민주주의’와 ‘신바람의 잔치판 정치’를 충분조건으로할 때 완성된다.

포퓰리즘(Populism,민중주의) 정치의 본령은 개인의 삶을 책임져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시민,주민)의 공통된 조건을 좋게 만드는 것이며 서민대중(민중)의 근본이익을 옹호하고 실현하는 것이다.
도와주지 않아도 잘사는 돈 많고, 권력 있고, 많이 배운 계급계층을 도와주는 것은 정치의 본령에서 벗어난 반포퓰리즘적인 기득권정치이다.

포퓰리즘(Populism,민중주의)적 시각에서 ‘정치적인 사람’이란 야유나 비난, 냉소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나쁜 조건을 어떻게 개선할지 변화의 가능성을 꿈꾸며 공통된 조건을 좋게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적 의미에서 ‘정치고수’란 공론장 토론이나 대화 안에서 공통된 조건을 좋게 만드는 과정에서 적조차도 안전하다 느끼게 하며 심리적 무장해제를 이끌어내는 사람을 일컫는다.

여섯 번째로 게임 같은 잔치판 정치문화관이다.
정치는 전쟁과 게임(스포츠등)사이를 오르내리는 중간적 활동이다. 전쟁과 게임은 양측이 누가 나은지 겨룬다는 의미에서 같지만 두 개의 행위는 판이하게 다르다.
전쟁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고 거기에는 따로 규칙이 없다.
전쟁에서는 상호간에 규칙을 정하는 토론이 필요 없다.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적을 죽이고 섬멸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 정당정치는 국가권력의 획득에 목표를 두기에 진영 간에 전쟁을 벌이듯 하는 전쟁판 정치문화가 익숙하다.
하지만 직접민주주의 시민정치는 전쟁판 정치문화를 답습해서는 안된다.
그와는 전혀 다른 게임과 같은 잔치판 정치문화를 만들고 안착시켜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신선하고 발랄하며 재미있는 잔치판 정치를 만들어야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정치의 지도자나 공직자를 선출할 때 잔치판 정치문화가 되려면 ‘선호도(인기)투표’와 ‘윷놀이 추첨’ 그리고 ‘경선’이라는 삼박자가 맞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긴장감과 재미 그리고 여유가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인들은 서민대중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하는 대의정치에 염증을 내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촛불시민정치세력이 이군돌기(異軍突起)로 나타나 완전히 차별화된 새로운 모습의 잔치판 정치문화로 돌풍을 일으키며 한국정치판을 뒤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 칼럼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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