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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숙 칼럼] 코로나 이후, 누구도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20.05.12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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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숙/원광대 교수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020년 5월 현재, 포스트 코로나19가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다.
어느새 세계 질서가 재편될 것이고 앞으로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란 미래학자들의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인류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로 야기된 미증유의 사태가 이번 한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코로나19 방역에서 상당한 성과를 만들어냈고, 전 세계가 이를 극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 변화의 과정에서 나타날 소외와 격차다.
무엇보다 교육에서 나타날 소외와 격차에 우리는 어떤 철학적 기조를 토대로 어떻게 제대로 대처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세계의 극찬과 질서의 재편, 우리의 선택

"한국은 미래의 길을 찾아 세계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와이대학 미래전략센터 소장, 짐 데이토(Jim Dator)는 우리나라가 지난 50년간 경제발전 모델로 삼았던 서구의 모델은 이제 수명을 다한 것 같다며, 스스로 선도해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실용적인 정부와 협력적 국민으로 이뤄진 인적자원과 비교적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세계 각국의 칭찬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는 과거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을 추격하기 바빴던 데서 벗어나 이제 한 뼘 훌쩍 자라있는 우리나라의 자화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지만 우리가 선도해갈 수 있으리란 자신감도 생겨났다.
4차 산업혁명도 우리가 더 앞당기고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생겼다.
과연 우리는 추격자 처지를 끝내고, 앞서가는 선도자로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새로 재편될 가치와 질서를 모범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 이후의 세계(The World after Coronavirus)’라는 기사(the Financial Times, 3. 20)에서 “우리가 지금 비상한 시기에 내리는 ‘선택’이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의 우리 인생(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체주의적 감시 대 시민의 역량 강화(citizen empowerment)’, ‘국수주의적 고립 대 국제적 결속(global solidarity)이 그것인데, 우리는 최근 양측 가치의 극단에서 시민의 참여를 끌어내고, 국제적인 연대와 결속으로 전이되는 변화를 목도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정체의 바이러스로 인해 불안했던 시기에 문재인 정부는 관련 사실을 정확하게 국민에게 알리고 진실을 마주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경우처럼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결속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국민성, 정부에 대한 신뢰, 리더십 등 우리의 잠재력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제도의 선진화도 목격했다. 우리나라가 국민건강보험제도를 통해 코로나19 사태의 대응에서 얼마나 유능했는지, 국민이 보건의료 안전망으로부터 얼마나 잘 보호받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미국의 경우 많은 국민들이 의료 혜택을 제때 받지 못하고 있고, 코로나19의 진단과 치료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 사실상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사망자 수가 머지않아 10만 명에 도달할 전망이다.
그리고 그 중 흑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가난 때문이다.
가용할 현금이 4백 불밖에 안 되는 국민이 전체의 40%라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보고서가 나오고, 이를 통해 미국 사회의 양극화와 빈부격차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가늠해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미국을 좇아 각종 사회 제도를 구성하기 바빴던 우리나라의 주류 세력은 이제라도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허술했던 사회 안전망에 대한 아픈 기억, 국가에 대한 불신

우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발생했던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안고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가 그랬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함으로 인해 개개인에게 큰 아픔을 남겼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리는 국가 공동체라고 부르던 그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닌지를 염려했던 암울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재난 이후 매일매일 퇴보하는가 싶었다. 공공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사회가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더 이상 가지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은 우리 사회에서 무서운 단어가 되고 말았다.
“가만히 있으라!”, 우리 학생들은 선원이 전문가니까 그들의 말을 믿었을 테고, 무서움을 견디며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떠올려본다.
책임지는 사람의 부재도 문제였지만, 사회적 재난 이후에도 성급하게 진행된 치유 프로그램, 지역사회의 편견, 민간과 공공의 영역 곳곳에서 한국 사회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진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은 우리에게 어떻게 새겨질까?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차별과 사회적 고립, 고용 불안이 인간의 몸을 해칠 수 있다는 연구 가설을 탐구하면서,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더 자주 아프고, 때로는 더 일찍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국가가 제공하는 안전망과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국민 개개인이 처한 사회적 여건과 상관없이 모두에게 작동하는 안전장치와 사회적 지원망이 있는 한, 사회적 상처는 결국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는 그리 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2020년 현재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요즘, 전 세계는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와 사회 안전망을 부러워하며 모델로 삼겠다고 한다.
우리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과연 어디까지여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된다. 의료기술의 발전만으로 충분한 해법이 나오기는 어렵고, 일자리를 잃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보호 장치, 한 아이도 소외됨이 없는 교육 등 이 거대한 전환기에 다양한 안전망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가져온 사회 변화, 명과 암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 우리의 판단 기준을 바꿔야 한다고들 한다.
거리두기에 익숙한 ‘코로나 사피엔스’란 신인류도 출연하였고,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smart phone과 homo sapiens의 합성어로 휴대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과 함께 4차 산업혁명시대를 앞당길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 변화 현상은 때론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우리는 세대의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인구통계학자들은 디지털 유목민으로 분류됐던 ‘밀레니얼 세대(Y세대)’의 뒤를 이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인 ‘Z세대’를 훌쩍 넘어, 이제는 디지털 문명화 세대인 ‘포노 사피엔스’, 거리두기를 일상화하는 ‘코로나 사피엔스’와 같은 새로운 인류 표준을 선보이고 있다.
새로운 기준이자 비주류와 주류의 접점에서 이색적인 트렌드를 창조해내는 ‘뉴 노멀’, 비대면, 무인화, 온라인 개학과 재택 근무로 대변하는 ‘언택트’, 위기관리 경영 기법으로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대처 방안을 마련하는 ‘컨틴전시 플랜(contingency plan)’ 등은 아직 어색하고 낯설다.

어두운 측면의 변화도 적지 않다. ‘혐오 발언과 차별’이 극대화되는 현상이 그것이다.
상대가 코로나19를 확산한다는 생각으로 삿대질을 하고 신체적으로 밀치는 장면을 언론을 통해 목격했다.
외국인을 멸시하거나 차별하고, 타국을 봉쇄하고 비하하는 등의 배타성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식의 저열한 반응과 대응은 결국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과 면역을 단단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경쟁이 아니라 연대와 협력, 공존이 중요하다.
국수주의자로 알려진 미국의 전 국무부 장관인 고령의 ‘헨리 키신저’도 아무리 미국이라도 국가적 수준의 노력만으로는 바이러스 퇴치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더 이상 미국이 글로벌 표준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민낯을 보인 작금에, 자국의 힘만으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고백이 아닐까 싶다.
이제 더 이상 미국이 세계 질서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 그간 과잉 미국화, 총체적 미국화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는 시점이 아닌가?

코로나19와 싸우기 위해 ‘과학계의 개방과 협력’도 급증하고 있다.
연구를 위한 자료와 데이터 공유, 그리고 데이터 분석을 위한 소스 코드까지 온라인상으로 공개해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의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는 연구 과정을 시공간으로 확장하여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개방하도록 함으로써 과학계와 사회 간의 상호 소통과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개방형 연구 협력(open collaboration)까지 포괄하여 공동으로 해법을 찾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예를 보면, 90개 대학이 참여하는 '멋쟁이 사자' 동아리 활동을 하는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통해 교육 콘텐츠를 만들고, 본인이 개발한 소스를 전부 공개해서 서로 학습하는 데 활용하는 사례가 있다.
메르스 때 개발했던 기술을 그대로 적용해서 단 하루 만에 코로나 확진자들이 어디를 다니는지, 지도상에서 볼 수 있는 코로나 앱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폰을 몸에 달고 다니는 세대인 ‘포노 사피엔스’는 기존 세대와 생각의 표준이 다르다.
이들은 인류가 겪는 쇼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디지털 플랫폼으로 세상에 내놓으면서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적응, 소외와 격차

급변하는 사회 현상, 그리고 저소득층 지원을 위한 국가 차원의 다양한 노력을 보면서 시대 변화의 흐름 속에 끝까지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어쩌면 시대의 변화선상에서 더 많은 격차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나온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상기하며, 시대의 변화를 불편하고 번거롭기 때문에 애써 외면고자 하는 분들의 삶을 헤아리고자 한다.
목수로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다니엘은 심장병이 악화되어 일을 계속 해나갈 수 없게 됐고,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에 찾아가지만 온라인에서 서식을 작성하지 않으면 신청할 수 없는 복잡한 절차에 좌절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경우처럼 디지털 시대에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의 벽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장차 더 강화될 새로운 디지털 사회의 ‘언텍트 문화’ 앞에서 좌절을 경험할 것이다.
코로나 이후 FANG(Facebook, Amazone, Netplix, Google)의 지배력이 더 막강해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살고 있던 과거의 생활 플랫폼이 앞으로는 급속히 바뀔 것이고, 팬데믹 쇼크 이후 혁명기라 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버겁고 힘들게 삶을 지탱해가는 분들과 그들 삶의 일상을 섬세하게 고려했으면 한다.

가령, 기술력과 자본력이 부족한 소상공인들은 이런 시스템을 갖추는 데 필요한 경제적·기술적 능력이 부족하다.
결국, 이들은 언텍트 문화에 편승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또, 장애인들은 면대면 소통의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고, 이게 고착화되면 관계의 단절을 겪게 될 것이다.
관계 기술의 부족을 야기하게 될 경우, 장애인들은 함께 어울리는 사회성 기술을 익히기 어렵게 된다.
이제 디지털 접근에서 드러날 소외를 생각하며, 사각지대에 관심을 갖고 ‘디지털 디바이드’에서 더 나아가 ‘언텍트 디바이드’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K방역 이어, 한 학생도 낙오됨 없는 K교육 실현해야

드디어 5월, 초여름이 다 돼서야 학교에서는 드디어 면대면 수업을 시작했다.
그간 온라인 개강으로 기술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했고, 동영상 강의 제작 공간과 인프라 등에 대한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창의적이고 융합적인 학습이 얼마나 가능할지, 온라인 교육은 과연 미래 교육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지, 이런 교육 방법이 자기 주도적 창의와 융합을 얼마나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미래 교육에 대한 창의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희망을 볼 수 있을지, 다소 해외에 뒤쳐졌던 고등 교육이 미래 교육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지, 기대 반 염려 반이다.
초·중등학교, 그리고 대학에서 개학을 하면서 최근 교육계는 교육 방법의 디지털화와 더불어 다양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만큼 안전하게 디지털 문명에 익숙해지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일이 절실하다.
 
이 대목에서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지 못하는 장애인을 생각하며, 교육에 대한 접근 방법을 고민한다.
가령, 어느 인지 장애인이 자기 프로파일을 표시한 후 인터넷에 접속하면 모든 언어가 그가 알기 쉬운 단어로 나타나고 형태도 이해하기 쉽도록 변환되게끔 할 수 있다.
한자어 등 전문 용어 풀이 지원을 통해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 구성과 같이 장애별 맞춤으로 특화된 구성과 편집 등 재미와 흥미를 유발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시각 장애인인 경우, 텍스트를 읽어 주거나 글자의 크기나 배경 색깔을 해당 장애에 맞게 바꿀 수도 있다.

교육 분야에서 발달 장애인의 정보 접근에 관한 내용은 꾸준히 논의되어 왔지만, 어디 이들 장애인뿐이랴?
어려운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치기 쉬운 학생, 이주민 가정의 학생 등 취약 계층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
이런 인권 감수성에 기반을 둔 촘촘한 노력을 통해 진정한 ‘보편적 복지’를 누릴 수 있는 포용적 복지국가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근저에는 문재인 정부가 표방하는 혁신적 포용국가, 국제기구가 애써 강조하는 ‘모두를 위한 교육(Education for All: EFA)’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된다.

교육의 방향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목표를 ‘인적 자원 개발’과 같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기능을 중심으로 경쟁과 스펙만을 쌓게 하는 것보다, 각자의 개성과 본연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발휘할 수 있도록 바꿔나가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삶의 비교우위에서 행복을 맛보려던 인정 욕구와 투쟁, 우리가 붙들고 있던 성공의 가치, 개발 지향이 얼마나 끝없이 목마른지, 조금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신인류 시대를 맞아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적응력을 길러나가야 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고 더불어 사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 시대의 올바른 방향이다.
K방역의 성숙함으로 국민 누구도 낙오되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된 것처럼, 새롭게 재편된 세계를 얼어갈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의 노정에서 한 사람도 낙오시키지 않는 존엄한 인간 교육,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키우는 교육!,
전 세계는 이제 우리에게 기품 있는 성숙한 교육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 강경숙 칼럼은 프레시안과 공동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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