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코리아저널 이진화 기자] 대기업 임원 등 재계 유력 인사들이 포함된 한국인 245명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유령기업)를 설립했다고 발표된 가운데 이 같은 명단 공개가 미칠 파장에 사회적 관심이 쏠리고 있다.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조세피난처에서 운영 중인 법인의 85%가 해운업과 관련된 특수목적법인(SPC)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들 대부분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세금 표준을 구현하는 국가를 지칭하는 ‘화이트 리스트’로 분류된 파나마에 몰려 있어 법인 설립 자체를 탈세 목적으로 보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4일 기업경영평가사이트 ‘CEO스코어’에 따르면 국내 30개 그룹 가운데 파나마와 케이맨제도, 버진아일랜드 등 7개 주요 조세피난처에 종속법인을 설립한 그룹은 16개이며 법인숫자는 281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법인 가운데 84.7%가 선박금융 및 해상운송업을 영위하기 위해 설립됐다. 특히 이들의 탈세 여부가 주목되고 있는데 일각에선 이들이 조세피난처에 세운 법인들은 부부 또는 부자와 같은 가족들이 주주나 이사로 등재돼 있는 데다 법인 설립 시점 전후 해외 부동산 거래가 이뤄져 비정상적 자금 이동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검찰이 관련 수사에 들어간 상황이지만 이 명단을 공개한 인터넷 언론과 탐사보도를 제의한 국제탐사보도협회에서 한국 정부에게는 관련 정보를 주지 않겠다는 방침이어서 향후 추가적인 공개명단이 곧 국세청 및 검찰의 수사 근거가 될 것으로 보여 정·관·재계에 후폭풍이 예상된다.
지난 5월22일 독립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계와 재벌 총수 등 재계 인사 20여 명 등에 대한 확인 작업을 거쳐 매주 계좌 보유자들의 명단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뉴스타파는 “현재 명단에 오른 사람들에 대해 동명이인 등 확인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페이퍼컴퍼니 설립 이유 등에 대한 답변을 받는 등 본인이 확인되는 대로 매주 순차적으로 공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버진아일랜드와 쿡 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물리적인 실체 없이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기업)를 설립한 한국인들은 모두 245명이며 확인된 245명 가운데 한국 주소를 기재한 사람은 159명,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 해외 주소를 기재한 사람은 86명으로 나타났다.
전 경총 회장인 이수영 OCI 회장과 그의 부인 김경자씨는 지난 2008년 4월 버진아일랜드에 ‘리치먼드 포레스트 매니지먼트’라는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 두 사람이 공동 주주이자 공동 이사였다.
특히 의심 가는 대목은 OCI가 당시 태양광전지 사업으로 주목받으면서 사세가 확대돼 지난 2007년 5월 10만원대이던 주가가 1년 후인 2008년 5월 40만원대로 치솟았다는 점이다.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전후해 주가가 폭등한 것. 또한 지분 25% 이상을 보유한 이 회장 일가가 받는 배당 이익도 크게 늘어나 2011년에는 257억원을 받아갔다.
앞서 OCI측 이 회장 일가는 지난 2009년 11월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주식 거래를 통해 부당 이득을 챙긴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으며 이 회장 장남 이우현 OCI 사장은 혐의가 인정돼 2011년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10억원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에 대해 OCI측은 사실 자체를 인정하면서도 불법거래는 전혀 없었다고 해명했다. OCI측은 언론을 통해 “이수영 회장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자회사인 OCI 엔터프라이즈의 이사회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받은 100만 달러 정도를 자산운용사를 통해 개인 계좌(페이퍼컴퍼니)를 개설했으나 2010년에 그 계좌를 폐쇄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미국 내 계좌에 동일 금액이 예치돼 있다”며 “이와 관련해 누락된 신고와 납세 사항이 있으면 즉시 완결하겠다”고 말했다.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도 버진아일랜드에 2007년 6월 1달러짜리 ‘카피올라니 홀딩스’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다. 이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기 2개월 전 조 전 부회장 부부가 구입한 콘도가 있는 호놀룰루 거리 이름과 같다고 알려져 있다.
조 전 부회장은 주당 1달러에 자본금 5만 달러 규모 회사를 설립한다는 내용으로 회사를 인가받았지만 실제 납입한 자본금은 1달러, 발행 주식은 1주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달러를 송금해 해외에 법인을 세울 경우 건당 1000달러, 연간 5만 달러를 넘으면 외국환 은행에 신고해야 하는데 이런 규제를 피한 셈이다.
조 전 부회장은 또 하와이의 다른 아파트 몇 채를 사고 파는 등 해외 부동산 거래를 빈번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페이퍼컴퍼니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의심을 받고 있다.
조 전 부회장은 부인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시기를 전후해 한진그룹 계열사 주식을 정리, 2005년 10월 대한항공 우선주 1만9797주를 전량 매각샜고, 2009년에는 한진해운 주식 4만9656주를 모두 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전문가들은 “계열사 주식 정리 과정에서 생긴 돈을 해외 페이퍼컴퍼니로 빼내 특정한 용도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의 막내동생인 조욱래 DSDL(옛 동성개발) 회장도 장남 조현강씨와 버진아일랜드에 지난 2007년 3월 ‘퀵 프로그레스 인베스트먼트’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 DSDL은 같은 해 조현강씨 등 조 회장 자녀가 대주주인 DSIV라는 자회사에 지분 93%를 넘겼다.
이후 자녀들은 254억원이라는 증여세를 물었지만 경영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배경이 의심을 사고 있다. 조욱래 회장은 또한 페이퍼컴퍼니가 설립된 그해 10월에는 하와이 주택을 210만 달러에 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항공 측은 언론을 통해 “조 전 부회장은 1997년 3월 퇴직한 이후 회사 행사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는다”며 “모르는 내용”이라고 반박했다. 조욱래 회장의 DSDL 측도 “이 문제에 관련해 아는 바도 없고 말씀드릴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세청은 가족 명의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대기업 사주들이 벌이는 전형적인 역외 탈세 유형이라는 지적이다.
지난해에도 해운업체 사주가 국내에서 번 소득을 자녀에게 주려고 조세피난처에 자녀와 직원 명의의 페이퍼컴퍼니를 2개 세운 뒤 페이퍼컴퍼니가 각종 선박 운송 대가를 챙기는 수법으로 소득을 해외로 옮겼다. 결국 법인세 433억원을 추징당했다.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재벌 총수 일가의 명단이 일부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와 관련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제러드 라일 기자는 당초 입수한 명단의 한국인 가운데 대기업 총수나 유명 인사가 있는지 몰랐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각국의 인사들이 망라돼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을 꼼꼼히 찾아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는 전 세계 60개국의 기자 160명이 참여하고 있는 비영리 탐사보도 기관으로 상근자는 4명밖에 되지 않지만 세계적인 협업을 통해 국제적인 파장을 가져온 사안을 보도하기도 했다. 라일 기자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의 계좌, 페이퍼컴퍼니와 관련한 자료를 최초로 입수한 호주의 탐사 전문 기자로 이 협회 소속 사무국장이다.
라일 기자는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은 이름과 주소만 갖고 있을 뿐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모른다며 이것이 각국에서 파트너를 정해 공동 작업을 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명단 발표는 분석작업을 하고 있는 각국 언론사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1차로 3명만 공개된 것도 뉴스타파의 판단이라면서 앞으로 어떤 인사들이 공개될지 자신은 모른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 정부가 명단 파악을 위해 접촉을 해온 적도 있었다고 밝혔다. 라일 기자는 다른 한국 언론들도 취재를 해왔지만 명단을 따로 공개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당초 한국인이 70명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로 245명으로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데이터를 추적하면서 추가로 찾아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향후 자료의 추가 공개 계획도 한국 측 파트너가 결정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더불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유력 인사들을 포함 한국인 명단이 공개되자 이들이 모두 회사 소재지로 선택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버진아일랜드는 중앙아메리카 동쪽, 서인도제도에 있는 섬 80개로 이뤄진 군도(群島)로 알려져 있다. 총면적 353㎢, 인구 10만9000명(2012년 기준)이다. 영국령과 미국령으로 나뉘어 있는데,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는 동부 36개 섬으로 이뤄져 있다.
버진아일랜드 중심가에는 큰 빌딩 하나 없는 조용한 섬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 주소를 둔 페이퍼컴퍼니 회사가 무려 90만개나 됐던 것이다. 페이퍼컴퍼니 설립은 300개에 달하는 회사설립 대행사들이 도맡아 해주고 있고 처음 설립 시 약 200여만원과 매해 80만원만 내면 된다는 것.
특정 사무실과 직원도 필요 없고 회사 주소도 대행사 주소를 같이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페이퍼컴퍼니를 어떠한 이유로 일부 유명인사들과 기업들이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이유는 바로 세금 때문일 것이다.
버진아일랜드는 법인의 소득에 극히 낮은 세율을 적용하거나, 세금을 실제 발생한 소득 일부에만 부과하는 등 파격적 세 감면 혜택을 준다. 여기에 외국환관리법, 회사법 규제도 거의 없다.
금융거래에서 익명성이 보장돼 탈세와 돈세탁용 자금 거래가 용이하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대행사들은 의뢰인의 기밀 유지를 생명으로 하는 만큼 이번 자료 유출사건으로 긴급 회의를 여는 등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조세피난처라는 말은 국제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2000년 파나마, 모나코, 리히텐슈타인 등 35개국을 ‘조세피난처’로 지목하며 탈세와 전쟁에 나서면서 회자됐다. OECD에 따르면 조세 피난처에 숨겨진 자산은 최소 1조7000억 달러에서 최대 11조5000억 달러에 이른다.
한편 국세청은 이수영 OCI 회장 부부 등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것으로 나타난 재벌가 등을 상대로 위법 여부에 대한 정밀 검증을 거쳐 탈세 혐의가 있으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김덕중 국세청장은 지난 5월23일 이 회장 부부를 포함해 한국인 245명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 “내용을 분석해 탈세 혐의가 있으면 원칙적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뉴스타파가 공개한 페이퍼컴퍼니 설립자와 기업을 상대로 해외 계좌 개설 여부, 계좌의 성격, 사용 내역 등 확보 가능한 자료에 대한 정밀 검토를 통해 탈세 혐의가 있을 경우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김 청장은 “역외탈세는 올해 국세청의 4대 중점과제의 하나이므로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과제”라며 “이런 점을 살려서 하겠다”고 설명했다. 앞서 국세청은 새 정부의 국정과제인 ‘지하경제 양성화’ 추진에 따른 대재산가, 고소득자영업자, 민생침해, 역외탈세 등 4개 분야를 중점으로 선정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반면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재계 유력 인사들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지자 재계는 후폭풍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개별기업의 이 같은 분위기를 인지한 듯 전경련은 이번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 논란에 대해 선별적이고 신중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홍성일 전경련 금융조세팀장은 언론을 통해 “조세피난처에 법인이 있다고 탈법, 불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각 사례별, 산업별 특성을 파악해 실태 조사를 펼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실태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해외투자에 대한 전방위적인 조사가 진행될 경우 자칫 기업들의 해외투자 등에 관한 심리적 위축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했다.
앞서 박근혜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 정책 가운데 유사석유, 도박, 마약만이 지하경제가 아닌 대기업의 역외 탈세, 비자금이 지하경제의 주범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조세피난처 명단 공개, CJ수사, 국세청 공정위의 대기업 압박 등 최근의 모든 상황들이 새 정부의 대기업 사정 신호탄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된 것이다.
이진화 기자 sisa@koreaj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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