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문화
겨울 저녁노을 같은 사랑이야기박범신 장편소설 「은교」를 읽고
  • 허경태 기자
  • 승인 2013.05.22 14:26
  • 댓글 0

▲ 시사코리아저널/ 허경태 선임기자.
74세의 괴테는 마리엔바트의 온천지에서 18세 소녀 울리케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올리케에 대한 열렬한 연정은 그가 쓴 연애시 '마리엔바트의 비가'에서 엿볼 수 있다.

괴테는 15세 소녀와의 풋풋한 첫사랑부터 74세의 노인이 되어 만난 18세 소녀와의 사모까지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 그 자체에 충실하면서 사랑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 힘이 괴테 인생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괴테는 죽기 한 달 전까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시를 썼다. 인간은 육체가 늙고 머리가 세어도 영혼은 나이를 먹지 않는 법이다. 영원히 늙지 않는 그의 명작들은 죽는 순간까지 이성을 사랑하려했던 정열적인 힘에 있지 않았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바로 괴테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범신의 연애소설 「은교」를 읽으면서 잠시나마 괴테와 울리케의 사랑을 떠올린 것은 청춘의 사랑이 아닌 세대를 뛰어넘는 저녁노을 같은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유명 시인 이적요(李寂寥). 암굴에서 그의 이름처럼 고요하고 쓸쓸하게 죽었다. 시인의 친구이자 Q변호사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1년 후에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되어있었다.

언론에서는 그의 유품을 공개하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지만, 노트를 직접 읽고 난 변호사는 핑계를 대면서 계속 미룬다. 노트에는 그가 열일곱 소녀인 한은교를 사랑했으며, 자기 곁에서 평생 챙겨준 제자이자 작가 서지우를 자신이 죽였다는 진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지우가 작가가 된 소설「심장」은 자신의 작품이었고, 심지어 신생 문학지에 발표한 단편도 서지우가 자신의 작품을 훔쳐서 발표했다는 등의 사실들도 기록되어 있었다.

시인의 사망 1주기에 맞춰 건립될 이적요기념관 공사가 한창인 시기에 만약 노트가 공개된다면 문단에 엄청난 폭풍이 일어날 것이었다.

고민에 빠진 Q변호사는 은교를 만나서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서지우 또한 이적요 시인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는 것을. 한은교로부터 서지우의 기록이 담긴 디스켓을 전해 받은 Q변호사는 두 사람에게서 벌어졌던 일들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적요는 은교의 싱싱한 젊은 육체를 통해 그동안 관심조차 없었던 여자의 관능미에 매료된다. 유리창을 닦는 행동에서 젊음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춘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젊음을 느끼기도 한다.

이적요 시인의 이런 모습을 본능적으로 느낀 서지우는 자기가 좋아하는 은교에 대한 집착이 점차 커진다. 결국 삼류 멜로드라마 같은 삼각관계로 빠져들게 되고, 오랫동안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사제지간이 은교를 둘러싸고 조금씩 갈등이 고조되어 간다.

문학적 재능이 부족했던 서지우는 스승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로 이적요 시인은 자기의 육체적 늙음을 비웃는 서지우에 대한 모멸감을 참으며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관계가 이어진다. 서지우가 죽기 전날 밤. 서지우는 한은교를 성(性)을 마음껏 유린한다.

창을 통해 그 사실을 모두 지켜 본 이적요 시인의 철저한 복수가 그날 새벽에 이루어진다. 서지우의 자동차에 펑크를 내고 자신의 당나귀(이적요의 차량)를 타고 가게 한다. 자동차 사고로 서지우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들은 이적요도 삶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적요가 조작한 자동차를 타고 가던 서지우는 카센타에서 들러 차를 점검한 후에 강의 장소로 떠난다. 물론 연료는 조금씩 흘렀지만 경미한 일이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언덕길에서 마주오던 트럭을 피하려다가 굴러 차량은 화염에 휩싸이고 결국 서지우의 생명은 끝이 난다.

부자지간 이상으로 끈끈했던 두 사람의 정이 단지 한 소녀의 등장으로 그렇게 철저하게 파멸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다.”“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

내가 만난 그날 밤의 슬픔은 후자였다.”“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름없다.”는 시인의 말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작가 박범신은 작가의 말에서‘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이야기에 빠져 밤낮 없이 읽으면서, 저자의 말대로 '밤에만' 읽었더라면 더욱 감동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소설 속에 인용된 시들 또한 이야기와 어우러져 너무 감동적이어서 조심스럽게 침을 삼키면서 읽었다. 사랑한다는 것과 나이가 많다는 것의 경계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부자(父子)보다 더 깊은 정이지만 서로의 사랑 앞에서는 모두가 눈이 먼 장님일 뿐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지독하게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은 여우비처럼 짧은 찰나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허경태 기자  gjshstnf@naver.com

<저작권자 © e시사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허경태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 1
  • 2
  • 3
  • 4
  • 5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