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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칼럼] 플랫폼, 혁신의 아이콘인가? 착취의 아이콘인가?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21.10.06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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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노무법인 벽성 대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1세기 하면 단연코 디지털 세상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마법같이 펼쳐지는 디지털 플랫폼 덕분에 서로 대면하지 않고도 일상적 활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매매행위나 일 등의 경제활동은 기본이고 여가와 놀이도 플랫폼에서 즐긴다.

이 마법 같은 플랫폼에서 우리는 마법 같은 자유도 누리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비참한 사고와 죽음, 아우성들이 그 마법의 플랫폼으로부터 끊이질 않고 있다.
거대한 네트워크 뒤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자본의 플랫폼화? 새로울 게 없다

플랫폼이란 본래 무언가를 타고 내리는 승강장을 뜻한다.
기차나 버스 역에서 타고 내리는 평평한 공간을 의미했으나, 특정 장치나 시스템 등을 구성하는 틀 또는 골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확대되어 컴퓨터 시스템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 삶의 기반이 된 ‘디지털 플랫폼’도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플랫폼 경제를 구현하는 디지털 방식이 획기적인 것일 뿐, 우리는 이미 플랫폼 구조에서 살고 있다.

20~30년 전으로 우리 삶을 되돌아보자. 집을 나오면 동네 어귀에는 일상에 필요한 수많은 종류의 가게들이 즐비했다.
출·퇴근길이나 외부 활동 후 귀가 길에 즐비한 가게들에서 대체로 경제 행위가 일어나고 여가 생활도 이뤄졌다.

지역 단위 경제의 주된 기반이었던 동네의 작은 가게들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교통이 편리한 거점마다 생겨난 이른바 대형 유통마트들에 비해 경쟁력이 뒤쳐지면서부터다.

규모의 경제는 동네의 작은 상점들을 순식간에 흡수했다.
심지어 학생들의 하굣길 요깃거리였던 김밥과 떡볶이 같은 푼돈 업종들까지 가맹점으로 삼켜버렸을 땐 위기감도 돌았다.
이후 동네 기반의 이런 활동들은 동네에서 떨어진 대형마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대형 유통마트는 말하자면 지금의 디지털 플랫폼의 off-line(대면) 버전이다.
다국적 자본처럼 순수 유통 형식도 있었지만, 국내 제조업 기반의 유통마트는 자사 제품 직판과 납품받은 제품이 혼재했다.

물론 매장 임대 방식이나 매출액에 대한 일정 비율의 수수료 부과 등의 다양한 형태로 진화했다.
야놀자, 카카오, 쿠팡, 네이버 등 디지털 버전에서는 플랫폼이 사업자들에게 수수료를 물리는 구조다.

다만 플랫폼 이용 사업자들에 대한 축적된 정보를 가지고 관련 사업들을 인수해서 직접 거느리기 시작(직판)했다는 점에선 더 이상 오프라인 방식과 비교하기가 무색해진다.

디지털 플랫폼은 대면 플랫폼의 업그레이드 버전

지배력을 획득한 카카오, 야놀자, 네이버, 쿠팡, 배민 등의 몇몇 공룡 플랫폼들이 수수료 등 가격 결정권을 쥔 채 상상을 초월하는 약탈적 방식으로 몸집을 불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규모와 속도 면에서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과거의 대형 유통마트가 동네 상권을 삼킨 후 허기를 채우듯 김밥이나 떡볶이 집까지 집어삼킨 방식 그대로다.
오프라인의 공간적 통합 흡수 방식이 온라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단시간에 차곡차곡 관찰된 어마어마한 정보량이 다시 그 플랫폼 이용자들을 상대로 미래 수익 사업에 활용되는 선순환 구조도 획기적이다.

배달 앱의 폐해가 대대적으로 이슈화됐던 2019년은 무료로 배포했던 ‘앱’ 사용을 갑자기 유료로 전환하면서 이용료가 급등하기 시작하자 이용자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골목상권 매출액의 20%가 플랫폼 사업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구체적 보도로 착취 구조가 드러나기도 했다.
김밥이나 된장찌개 1만 원어치를 팔면 2천 원을 떼어가는 구조였으니, 코 묻은 돈 갈취해간다는 말이 나올만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수준은 이제 신사적이다. 이용 수수료에 더해 각종 광고 압력, 배달 비용 인상분에 대한 부담 전가, 기타 각종 불공정 계약 방식으로 배달 앱의 압박과 횡포가 심각하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혹독한 육체노동으로 창출하는 알량한 매출액에서 이런 명목의 비용이 50%까지 육박한다는 자영업자들의 하소연도 들린다.

생존의 위협에 분신자살로까지 번졌던 카카오와 택시기사들 간의 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절한 죽음 앞에서도 세상은 어김없이 독점 플랫폼의 의지대로 흘러갔다.
극단적 선택에 세상은 아주 잠시 술렁였을 뿐, 택시기사들이나 승객들 모두 '앱' 택시 이용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승객은 편리성에, 택시기사는 승객과 손쉽게 연결되는 효율성에 고마움까지 느끼며 너도나도 애용하기 시작했다.
'카카오T 앱'을 설치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나 역시도 일반 택시 잡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이 돼서야 결국 백기 들고 투항했다.

플랫폼 자본의 독점적 지위는 어떻게 견고해지나?

과거의 대형마트가 소비자를 현혹시키며 동네 장사를 잠식할 때 써먹었던 두 가지의 심리 효과가 있다.
하나는 없는 게 없는 꿈같은 초호화 파티에 초대된 기분이 들도록 연출한 것이다.
자잘한 동네 상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거대한 매장에 멋지게 배치된 상품들’은 값싼 물건들조차 그럴 듯하게 보이게 했다.

다른 하나는 그 호화 파티에 오면 누구라도 싼 값으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는 메시지의 ‘행복한 세일 전략’이다.
지금의 디지털 플랫폼은 어떤가. 잠자리에 들기 전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새벽이면 주문한 상품이 조용히 문 앞에 배달되어 있다.

누군가는 매일 매일이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고 했던가?
이런 전략은 이용자들 스스로 기존 시스템을 버리고 새로운 기반(이른바 디지털 플랫폼)으로 갈아타기 시작해서 종국에는 대부분의 소비자가 공공재처럼 인식하고 이용하게 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생산에서 유통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완벽하게 기계화되지 않는 한, 초고속 배송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꿈꾸듯 신속한 배송을 하려면 당연히 ‘누군가의 더욱 혹독한 노동’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속도가 생명인 온라인 세상이 off-line의 생산 및 유통 과정에서 더욱 멀어지게 되다 보니, 이런 혹독한 착취도 더욱 은폐되고 심화된다.

공장식의 축산 농장으로 가공 단계가 보이지 않게 되면서 잔인한 현장은 은폐되고 생명에 둔감해지면서 인간이 더욱 탐욕스러워지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노동과 소비현상도 대면 방식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영상물만을 클릭해 소비할 뿐, 해당 상품이 내 앞에 오기까지 거치게 되는 ‘혹독한 과정’에는 점점 무뎌진다.
실상과 점점 격리되어 가는 온라인 세상의 불행하고도 위험한 또 다른 장면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혹독한 과정에는 하청과 영세 납품업체들에 대한 ‘가격 후려치기’도 동반된다.
독과점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과거의 대형마트들이 그랬듯이 공룡 플랫폼들도 낙후된 구식 플랫폼을 편리하게 혁신한 IT 기술의 선구자인양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나면,

이들의 참혹한 희생들도 곧 잊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초창기의 참신한 벤처 창업자라는 이미지는 어느덧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도도한 독점 기업으로 환생한다.

정부의 늑장 대응, 착취되는 노동과 살찌는 플랫폼 기업들

이처럼 플랫폼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데도 정부의 대응은 늘 뒷북치기다.
카풀 논쟁 당시, 문 대통령은 “4차 산업혁명으로 경제적·사회적 현실이 바뀌고 있는데도 과거의 가치를 고집하는 사례가 왕왕 있다”면서 “규제가 풀려 발생하는 피해에 대해서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도록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므로 정부가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들의 우려가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기 위함이었을까?
택시 종사자들의 생존 기반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던 플랫폼 기업의 독점적 과정을 걱정한 것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려했던 대로 바로 그 공룡화된 기업들은 문어발식 확장으로 동네 미용실 등 열거하기도 어려운 자잘한 업종들까지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새로운 먹이사슬 구조로 바뀐 뒤에서야, 정부와 국회는 마치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뒷북치기 규제를 시작했다.

플랫폼 노동에서 발생하는 인명 사고들과 고용 불안정성이 지속적으로 사회문제가 된 지도 오래 되었다.
그 사회문제가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으로 전가되고 있을 때도 대책 없이 손 놓고 있다가 수많은 생명들이 거리와 창고에서 죽어나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동자로 보호받지 못하는 수많은 취약 계층이 대량 양산되고 있음에도 ‘노동자성’ 타령으로 시간만 보내는 동안에도 사업자라는 탈이 씌워진 채 약탈적 착취는 더욱 급증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상품 노동자로서 마지막 보호막인 노동법으로부터도 외면을 받은 채 여전히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

도대체 그 ‘노동자성’이라는 기준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는 전형적인 오프라인 사업장 근무형태에서 나온, 지금의 현실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오래된 기준이다.
사업장 개념이 모호해지고, 심지어 온라인 환경의 노동이 급증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형식에 집착하며 대응 시간을 놓치고 있다. 카풀 논쟁 당시, 택시기사들의 저항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기억해보자. 도래할 새로운 가치가 개인들의 생존 문제를 압도했다.

새로운 가치에는 각종 규제를 풀어주면서 그 새로운 가치를 바닥에서 실현해갈 노동자들을 위한 안정장치에는 왜 그리 소홀했던 것인가.
노동자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이 자본의 입맛대로 뒤죽박죽 바뀌고 길거리에서 일하다 죽어가는 일들이 수시로 발생해도 ‘손 놓고 있던 정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쩔 수 있는 순간이라도 됐다는 것인가? 독점 플랫폼 기업들이 숙박·여행·유통에 이어 심지어 미용실까지 삼켜버렸다며 언론에서 보도하기 시작하자 다 늦게 정의에 칼날을 빼든 정부가 이런 상황을 되돌릴 수는 있을까?

혁신은 대중의 희생 위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문 대통령의 말처럼 기술 혁신이란 결국 독점적 지위를 줄 정도로 규제를 풀어야만 가능한 것인가?
자본의 시스템이 변화되는 전환기마다 들이대는 혁신이니 도약이니 하는 무기 앞에 대중들은 늘 주눅이 들듯 희생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혁신이 아니라 희생을 담보한 특혜가 아닌가?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한 대중들은 눈앞의 편리함에 쉽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취약한 구조에서 억울한 희생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공정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 아니던가.

그러나 우리 사회를 보면, 항상 먹고 먹히는 정글과 같은 무참한 변화의 과정을 한참이나 겪고 나서야 ‘사후약방문’ 하는 식이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아무 준비도 생각도 없는 정부로 인해 국민은 각자도생을 해야만 한다. 대중들이 죽어나가고 피로감에 휩싸일 때쯤에야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뭔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한다.
오랜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나라답게 급속도로 진행되는 디지털 경제의 현장에서도 사고가 연일 끊이질 않고 있다.

혁신은 인간을 해치지 않을 때라야 의미가 있는 것!

이제 ‘혁신은 도대체 무엇이고 누굴 위해 필요한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볼 차례다.
2019년 카풀 논쟁 당시, 소카 이재웅 대표는 소비자의 편익을 위해 신산업인 카풀 서비스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했던 신산업이 한편으론 영세한 공급자들을 몰아내고 또 한편으론 고스란히 소비자 부담으로 되돌아온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미국도 최근 빅테크에 대한 이런 문제를 인식해 규제를 시작했다.
미 연방거래위원회가 페이스북이나 구글 등의 빅테크 기업을 독과점법 위반으로 제소했으나 1심 법원은 페이스북에 손을 들어준 상태다.
그러나 미 하원은 포기하지 않고 ‘플랫폼 독점 종식 법안’ 등 5개 법안을 법사위원회에서 통과시키며 빅테크에 대한 규제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술의 발전이 철저히 사유화되어 가는 오늘날,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국가 권력은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 국면에서도 방역체계를 지원할 인터넷 행정망 등의 IT 기술력이 시급했듯이, 이윤 추구가 목적이 아닌 국가 행정은 결국 국민의 희생을 담보로 이뤄낸 민간기업의 혁신(?)의 결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민간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기술력은 위기 시에 국민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개인 정보에 대한 느슨한 규제에 대해 이미 일찍부터 각계각층에서 우려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루가 멀다고 죽어나가는 목숨의 대가, 착취의 대가로 이뤄진 결과를 혁신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 혁신이란 도대체 인류에게 무엇인지부터 되돌아봐야 한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기본 인프라이다.
공중의 일상생활에 필요불가결한 것인 경우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규제하거나 공기업 형태로 직접 경영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공서비스 영역이다.

그러나 혁신을 위해 민간의 운영이 불가피한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민간 기업이 독점적 지위로 이용자들의 선택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게다가 정부는 이미 기술 혁신을 이유로 플랫폼 기업들에게 각종 규제를 풀어주었다.
이후에라도 독점적 횡포가 예측되고 드러나면 적시에 규제를 해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이런 상황을 알고도 당장의 편리함에 취해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정부도 플랫폼 이용자들도 긴 호흡으로 차분히 대응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예측 가능한 상황을 늘 주시하며 선제적 규제와 법제화부터 시작할 때다. 인간을 위한 혁신은 인간을 해치지 않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 필자 김진희는 공인노무사로 ‘노무법인 벽성’에서 대표를 맡고 있다. 복지국가의 노동 정책, 경제민주화와 노동권 강화가 주된 관심 분야이며,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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