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유년의 한 페이지가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있는 작은 시골 학교는 없어지지 않으리라.

마른 먼지 풀썩이는 시골길을 십리씩이나 걸어 학교를 다녀야 했던 나는 이른바 산골 아이였다. 손바닥 만 한 운동장 둘레로 키 작은 측백나무들이 울타리삼아 둘러쳐져있고, 운동장 한 켠에 달랑 매달린 그네 하나와 철봉대, 그리고 녹슬어 삐걱거리는 시이소오가 아쉬운 대로 학교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조그마한 학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울타리를 경계로 뒤편에는 슬레트 지붕을 얹은 나지막한 사택이 두어 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초라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택이었다. 전기시설이 되어있지 않던 때라 밤이면 석유기름으로 등불을 밝히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짓는 부엌이 있었다.

슬레트 지붕의 허름한 사택에 사셨던 선생님들...그 분들이 그 시절 우리들에게는 이방인과 다름없었다.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마치 외계인을 대하는 듯 우리들의 호기심어린 눈망울은 반짝거렸다.

선생님의 아들이나 딸이 우리들과 또래일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 아이들은 친구라기보다는 우리와는 구별되는 공주나 왕자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들은 산골 아이 특유의 수줍음과 소심함으로 말하기 능력이 아주 부족했다.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였다. 잘못을 범한 아이처럼 멀리 선생님의 모습이 보일라 치면 숨기에 여념이 없었다. 매일 얼굴 마주보며 수업한 담임선생님인데도 길에서 갑자기 만나게 될 경우 빨개진 얼굴로 도망가기 일쑤였다.

수업 중에 질문이라도 받게 되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겁에 질린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곤 했던 우리들은 선생님의 속을 많이도 답답하게 해 드렸다.

4학년으로 막 올라갔을 때였다. 우리 학교에 여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다. 그 당시 우리 지역은 버스가 하루에 두 번 밖에 다니지 않아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더구나 전기시설이 없어 사택의 사정이 너무나 열악하였다.

그런 이유로 여 선생님이 좀처럼 오시지 않던 터라 여 선생님의 부임은 우리들의 마음을 적잖이 설레게 했었다. 그런데 더 흥분했던 것은 그 천사 처럼 예쁜 여 선생님이 우리 4학년 담임을 맡는다는 것이 아닌가. 긴 머리를 뒤로 느슨하게 묶고 계셨던 선생님의 뒷모습은 몹시 예뻤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책보를 허리에 질끈 매고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야야. 이거 선생님 갖다 드리거라. 알겄나?" 하시며 부추 한 단을 주셨다. 텃밭에서 금방 베어온 부추라 싱싱했고 지푸라기로 단단히 묶어져 있었다.

부추를 들고 마냥 신이 나서 그 먼 십리 길을 단숨에 달렸다. 학교가 점점 가까워 오자 단발머리 어린 소녀의 마음속엔 슬그머니 근심이 일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없어졌다.

"이걸 부끄러워서 어떻게 전해 드리노. 괜히 갖고 왔데이." 선생님께 전해 드릴 생각을 하니 용기가 없어지고 냉큼 받아 온 일이 후회가 되는 것이었다. 전해 드릴 일을 고민하다 보니 어느덧 학교에 도착하고 말았다.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사택 마당을 들어섰다.

선생님의 방문 앞 댓돌 위에 선생님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인기척이 나는 걸로 보아 선생님이 방안에 계신 것이 분명하였다.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힘껏 잡아 당겼다. 걱정만 하다가 노크하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때 선생님은 짧은 속옷 바람으로 앉아 계셨던 것 같다. 화들짝 놀라시며 하얗게 드러난 무릎을 감추시는 선생님께 고함지르듯이 빠르게 말해 버렸다.

"선생님예. 이거 울 엄마가 갖다 드리라 카던데예!" 말과 동시에 부추 단을 방바닥에 던지듯 놓고 뛰어나와 버렸다. 그때 선생님은 얼마나 놀라셨을까? 더구나 속옷 바람으로 앉아 계시다가 당한 황당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그리도 맹꽁이 같았는지 모르겠다.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태산 같은 고민을 하였던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요즘은 시골 아이들이라도 아주 똑똑하고 자신의 의사표현을 분명히 할 줄 안다. 오히려 자기표현이 지나치게 강하여 당돌하기까지 하다. 그런 요즘 아이들의 모습과 너무나 내성적이었던 나의 유년시절을 비교해 보곤 한다.

때로는 요즘 어린이들에게서 순수함이 실종되고 있다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이런 맥락에서 생각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학교 옆으로 세족 장이라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 송사리 떼들이 조약돌 사이로 자유로이 헤엄치며 놀던 아주 맑은 시내였다. 자연학습장에서 작업을 한 후, 또는 화단의 잡초 뽑기를 한 후 단체로 세족 장에 들어 가 손발을 씻노라면 송사리들이 우리들의 발뒤꿈치를 물며 간질이기도 했다. 학생이 없어 얼마 전에 그 학교가 폐교되었다고 했다.

행복한 유년의 한 페이지가 없어져 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에 있는 작은 시골 학교는 없어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나의 가슴 속에는 생머리 길게 묶은 그 처녀 선생님도 늙지 않은 그 모습 그대로 계시리라. 이제 뵙는다면 부끄럼도 타지 않을 것이고 맹꽁이 같은 한심한 짓도 하지 않을 터인데 말이다. 선생님이 아직도 교직에 계시다면 지금쯤 교감이나 교장 선생님이 되셨을 지도 모른다.

산골 초등학교에서의 황당했던 그 일과 단발머리 나풀대던 어린 여자아이를 기억하고 계실까? 아득히 멀어져 간 유년의 추억들을 펼쳐 보면서 눈물 날 만큼 웃기도 하리라. 기쁨과 슬픔과 아픔이 어우러진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리라.

그런 귀한 만남을 기대하며 유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들이 퇴색되지 않도록 진한 물감으로 색 입혀야겠다. 그리하여 가슴 깊숙한 곳에 저장해 두어야겠다.


▽ 최영옥 프로필

慶北 慶州 출생
계간 문학세상 詩 등단
한국 예총 예술세계 수필 등단
예술시대작가회회원
동작문인협회회원
現 동서울 교회 신문 편집장
시집 “사람아 사람아”(2007년 푸른 사상)
e mail/ogi10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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