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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정의를 위한 응징은 정당화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무엇보다도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인간감정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채 흥행을 위한 잔인한 작품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관객 800만을 넘긴 영화 ‘친구’도 추억과 의리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 잔인함은 극에 달한다. ‘추격자’ 같은 경우는 사이코패스의 잔혹함만을 보였고, ‘악마를 보았다’는 처절한 복수극이 너무나 잔인하여 일부를 삭제하여 개봉했다는 말도 있다.
이런 영화들을 배포하여 무엇을 얻고자하는 것인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오로지 흥행만을 위한 일인지, 아니면 마구잡이식 칼질을 통하여 스트레스를 해소시키고자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중전달매체인 TV, 방송, 영화 등은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전달 범위가 넓고 교육적인 효과가 크다. 따라서 검열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되면 삭제를 하거나 방영금지조치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명분에 눌려 도덕적 잣대는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드라마에 시어머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내 보내는가 하면,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드라마는 게이(남자동성애자)를 등장시켰다.
최근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멋진 배우들의 담배 피우는 모습은 흡연의 충동을 유도한다고 판단되어 제재를 가한 것이다. 담배피우는 모습은 안되면서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경시하게 하는 모습은 괜찮다는 말인가? 그것을 예술이란 이름으로 포장을 하여 정당화 하는 현실에 누가 올바른 조언을 해야 하는가?
지난 시절 대가족제도하에서는 상당한 통제 속에서 살아왔다. 위급할 때 피신할 수 있는 할아버지의 사랑방이 있는가 하면 엄한 아버지가 계셨고 이웃의 이목이 있었다.
보호막이었던 절대적 권위의 어른이 안 계신 지금은 엄한 아버지보다 친구 같은 아버지가 좋다. 통제보다 자율성이 커짐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엄격한 기준이 없는 자율은 오히려 방종만을 초래한다.
급변하는 의식구조의 변화로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는 일들은 비일비재 하다. 그릇됨을 알면서도 아니라고 말 할 수 없는 사회풍토에 누가 회초리를 들어야 하는가? 누가 이 시대의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해야 하며 어떤 사람들이 어른의 자리를 지켜 주어야 하는가?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에서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준엄하게 꾸짖어 줄 분들은 그래도 종교 지도자들과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바로 당신이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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