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백담사(百潭寺)에서 세번째 겨울을 맞으며"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10.10.04 00:00
  • 댓글 0
"백담사(百潭寺)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으며"

-선악이 모두, 一切唯心造 인 것을-



[아래 글은 전두환 전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여사의 육필 수기이다. 오래전, 백담사에서 세상을 향해 공개한 글이다. 글쓴이는 이제 인터넷에 공개하기를 원하지 않으나, 같은 불제자인 필자는 불교계 및 세상에 역사의 교훈으로 인터넷에 감히 공개에 나섰다.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알리는 범종소리같은 소식을 소개한다. 주(註,이법철]


"백담사(百潭寺)에서 세 번째 겨울을 맞으며"




저희 내외가 백담사에 온 것은 1988년 11월 23일 입니다. 지금이 동짓달이니 백담사에서 보낸 세월도 벌써 두 해가 되가는 셈입니다.
두 해 전, 이곳에 오던 날도 백담사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절의 위치도, 절의 역사도, 절의 형편도, 그 무엇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절의 안내도를 구해와 내설악 깊숙이 위치한 백담사에 가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 집을 떠나기 바로 전날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즐거운 여행이나 외출이 길이 아니라 고통에 찬 '은둔'의 길이었습니다.

정든 집을 두고 어디론가 떠나가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20년 전 하수도도 없던 그곳에 어렵게 땅을 장만하고 그 분이 월남전에 가 계신 동안 직접 집을 지었던, 저희 내외에겐 고향이나 다름없는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선 바로 정든 집, 응접실에서 '對 국민 사과문'을 발표하셨습니다. 청와대를 나온지 아홉달 만의 일입니다.

백담사를 향해 떠나던 아침이 생각납니다. 그 분은 침묵을 지키고 계셨는데 차속에서 저는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 엄동설한, 백담사 법당으로 기도하러 가는 이순자 여사.

몇 번이고 '곁에 계신 분을 생각해야지'하고 다짐했지만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날일이 생각나면 늘 부끄럽기만 합니다.

백담사는 참 멀기도 했습니다.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한데다 빈속이어서 멀미도 심했습니다. 도시락이 준비돼 있었지만 마음의 고통 때문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팔선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곳을 지나고도 차는 북쪽을 향해 한참을 더 달렸습니다. 백담사 입구에서부터 다시 수십리의 외길이 끝나는 계곡 사이에, 통나무로 얽은 만든 외나무다리가 보였습니다. 스님들과, 앞질러 달려온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외나무 다리 뒤로 낡고 초라한 작은 절 하나가 바라다 보였습니다.

그것이 백담사와 저희 내외와의 첫만남이었습니다. 스산한 초겨울의 저녁빛속에서 백담사는 쓸쓸해 보였습니다.

절에서 저희 내외에게 내어준 방은 현관도 덧문도 없이 헤진 창호지문 하나가 출입문 구실을 하고 있는 두 평 남짓한 남루한 작은 방이었습니다.

뒤곁 마루를 들치고 아궁이에 군불을 때자 매운 연기가 방안으로 몰려 들어와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외풍은 또 얼마나 센지 창호지 문을 열면 마치 밖에서 누군가 잡아 당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선 연기가 들어오는 뒷문을 봉하고 담요에 끈을 매어달아 외풍을 막았습니다.

전깃불 조차 없는 상황이어서 촛불을 켜고서 그 분과 마주 앉았습니다.

입을 열어 그 분을 위로해 드려야 할텐데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어 나와주질 않았습니다. 어려운 때에 위로해 드릴 말한마디도 찾을 수 없다니 아내된 제모습이 너무도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여보, 밖에 좀 나가볼까?"

그 분이 먼저 제게 말을 건네주셨습니다. 묵묵히 두꺼운 웃옷을 껴입고 그 분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 밖에는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를 보자 달려왔습니다.

그 분은 웃으시면서, "추운대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며 기자들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마음은 눈물로 가득차 있는데 웃음으로 얼버무리느라 애쓰던 제모습이 기억납니다. 초겨울인데도 그곳은 이미 영하 15도, 얼어붙기는 제마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밖에도 있을 수 없자,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물소리, 바람소리, 풍경소리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경황이 없어 말한마디 번번히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 막내아들 재만이를 생각하자 가슴이 메어 왔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때 청와대에 들어가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에게 엄마노릇 한번 제대로 못해 주었습니다. 청와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 가기만 하면 그동안 못다한 정성을 쏟아 주리라 결심했지만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낯선 곳으로 떠나오게 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외가댁도, 아니 온 친척들이 모두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어 아이를 맡길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황망히 서울을 떠나 오면서 누나가 있는 사돈댁에 가 있도록 일어 두었지만 그 애가 받았을 엄청난 충격이 생각나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목탁소리에 일어나 촛불앞에 앉았습니다.

"재만에게, 새벽 3시50분, 목탁소리에 잠이 깨어 촛불을 켜고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쓴다."

저의 내외의 백담사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사흘되는 날부터 저희 내외는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는 격언이 있듯이,
절에 왔으니 절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저희 내외의 생각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백담사에 오기전만 해도 저희 내외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 종교의식이나 기도의식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뚜렷한 신심도 없이 영하 18도나 되는 추위속에서 법당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새벽 3시30분쯤이면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목욕은 엄두도 못낼 형편이어서 저희 부부는 새벽이면 아랫목에 놓아둔 대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고 법당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막상 예불을 위해 법당에 나가 앉아 있으면 머리속에선 만가지 생각이 오갔습니다. 저는 제앞에 던져진 '은둔'이라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할지 몰라 절절 매었습니다.
말이 은둔이지 제겐 '귀양살이'처럼 느껴졌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일평생 편안한 잠 한번 싫컷 주무시지 못하고 고단하게 살아온 그 분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남들이 학교 가는 시간에 대구 약전 골목에서 국민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그 분이었습니다. 오랜 군인생활을 거쳐 청와대에 들어가신 후에도 7년반의 세월을 새벽 잠 한번 마음놓고 누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임기가 끝나 청와대를 떠나시면 제일 먼저 하시고 싶은 일이 무엇입니까?"

기자들은 이따금 그 분께 그렇게 질문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선 잠이나 실컷 자고 싶습니다"

물론 대통령이란 직분은 그 직함이 주는 명예만큼이나 남모르는 수고는 물론 생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하는 그런 자리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아니 대통령이란 직분은 이미 직업을 뛰어 넘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 가시던 때만해도 젊고 싱싱하던 그 분의 모습이 점점 과로에 지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때마다 아내인 저는 청와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평범한 시민이 되어 그분이 마음껏 쉬실 수 있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대해 보곤 했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그 분의 '약속'이자 '정치철학'이었습니다. 우리 온가족들도 그 분이 대통령 임기를 마치신 후 예전의 그 다감하고 자상한 아버지로 돌아와 주실 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고대하곤 했습니다.

남 모르게 제가 지니고 있던 꿈도 많았습니다. 전 이따금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와 보람있는 활을 하고 있는 대통령들에 대한 얘기나 책들을 찾아 읽어 보면서, 그 분의 퇴임 이후의 생활을 가만히 설계해 보곤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못다한 엄마 노릇도 해보고, 못만났던 친구집에도 놀러가고, 편지도 쓰고, 자라는 손자 아이들을 '무릎에 앉힌 채 옛 이야기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7년반의 임기를 끝내고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녀딸 수현이의 손을 잡고 저희 내외가 청와대를 떠나 연희동 집으로 돌아온 것은 1988년 2월 25일이었습니다. 재임기간동안 비록 여러번,

"대통령직을 하루도 더도 덜도 하지 않겠다. 임기가 끝나면 스스로 청와대를 걸어 나가겠다."

고 그 분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말했지만 단 한번도 대통령의 '평화적 정부 이양'을 경험해 보지 못한 국민들은 그 분의 약속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약속을 믿도록 하는데는 7년반의 세월이 걸린 셈입니다.

그 날 그 분은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수현이 할아버지가 되어 이웃들 곁으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박한 행복감도 잠시 뿐 퇴임후 정든 집으로 돌아온 저희 내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근거없는 갖가지 비리들에 대한 소문과 보도들이 저희 내외를 괴롭혔습니다. 거의 아홉달 동안 계속된 그 시간은 저희 부부에겐 진실로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곤혹스러울 때면, 그 분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처럼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세상이 달라지자 저희 내외를 피하는 것 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남에게 질세라 앞장 서서 비난을 퍼붓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살기 위한 몸짓이라도 해도 너무 하는것만 같았습니다. 진실을 알고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정직하고 용기있게 한마디만 해주면 모든것이 올바로 밝혀질텐데 웬일인지 그 누구도 우리를 위해 입을 열려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이 무상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지만 상황과 이익에 따라 거침없이 변신하고 굴절하는 사람의 허약한 속성에, 회의와 환멸이 느꺼지기 조차 했습니다.
"사람을 도와주면 악으로 갚고 짐승을 도와주면 은혜로 갚는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한번 권력을 잡으면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양입니다.

그런 분위기 에서 구속된 형제들도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말씀이 적고 인정이 많으신데다 각별히 동생을 아끼시던 아주버님, 고생속에서 그토록 애쓰던 동생이 대통령이 되어 이젠 원도 한도 없다고 하시던 그 아주버님이, 회갑마저도 옥중에서 보내신 것을 생각하니 한스러웠습니다. 언니 셋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 언니가 없는 없는 저에게 마치 친언니 같은 정을 느끼게 해주신 큰 동서의 모습도 눈물없이는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여대생시절, 직업에 대한 그 분의 순진하리 만큼 우직한 정열과, 가식을 모르는 정직한 성품에 감동되어 사랑에 빠졌던 저는 밥 한 번 지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어떤 고생이든지 다 해내겠다"고 말씀드린 후 그 분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집에 들어가 살림을 시작하고 보니, 일이 낯설고 힘들어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쩔쩔매며 애를 쓰는 제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저 모르게 우물물을 빈그릇에 채워 주시기도 하고 빨래통의 물을 버려주시기도 하던 막내 도련님의 모습도 생각났습니다.

일곱이나 되는 딸을 낳으시면서, 아이를 낳을 때마다 그 힘든 해산의 고통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다시 아이를 낳고 싶다고 안타까워 우시던 친정어머님이, 피난중에 그 아들을 얻으시고 기뻐하시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 외아들을 감옥에 보내시고 추운 겨울 내내 울며 보내실 팔순의 늙으신 어머님을 생각하면, 기도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그만 저도 모르게 흐느낌이 터져나와 당황해 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어머님 생신 때, 대통령이 된 사위의 축하를 받으시는 어머님을 보고 아버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딸도 이리 좋은데 왜 딸만 낳으면 그리 섧게 울었노."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리 좋게 될 줄 알았어야지요."

그토록 순진하게 좋아하시는 어머님을 보면서, 그때는 뭔가 크게 효도를 했다는 기분이 들어 그 분도 저도 흐뭇해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소용돌이 속에서, 그렇게도 아끼시던 외아들을 감옥에 보내야 하는 변을 당하셨으니, 세상에 이런 불효가 또 어디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재임기간 중 좀 더 올바르게 지도해주고 단속해 주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과 후회스러움이 몰려왔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분이 대통령직을 맡으셨다기에 내린 결정들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고통과 불이익을 당하게 된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제겐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만든 정책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단점과 부작용이 있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한사람이 당한 어려움은 그 사람만의 고통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온가족들의 고통이라는 것을, 네 아이를 키운 어머니인 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새벽 예불을 위해 매일 법당에 나가도 마음속엔 언제나 분노와 배신감, 억울함,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고립감으로 가득찼습니다. 그것은 법당을 떠난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날 법당문을 나와 뒷산을 걸으면서 전 보았습니다.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과, 대청봉으로부터 내리쳐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도 꿋꿋이 버텨왔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밤사이 소리없이 쌓인 "눈(雪)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것을 말입니다.

쓰러진 고목들 중에는 썩어서 텅 비어버린 속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무들 조차 수백년 긴 세월을 사노라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속'이 썩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사람이건 나무이건 생명있는 존재들이 겪어내야 하는 고통의 모양들이 서럽게 생각되었습니다.

제 마음도 바로 그 쓰러진 고목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 지금의 내부에서 뒤범벅이 되고 있는 그 극한적인 마음의 혼란을 그 분 앞에서 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노와 배신감, 억울함이라면 그 분이 더 깊으셨을 것입니다. 그 분의 재임기간동안 불이익을 당한 분들에 대한 마음 아픔도 그 분이 몇 갑절 더 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 분의 침묵이 제 가슴을 더 메어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 지금도 기억합니다. 며칠밤인가 단 한잠도 이루지 못하고 꼬박 앉으신 채 밤을 지새우시던 그 분의 모습을 말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우선 기도에 필요한 '반야심경', '천수경' 등을 외우기도 했습니다. 먹을 갈아 고요한 마음으로 경(經)을 써보기도 했고 쪽지에 써가지고 다니며 입시생들처럼 열심히 외우기도 했습니다. 어떤 날은 마음이 하도 혼란해서 잘 외워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정말 외우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한달 쯤 지나고 새해가 되자 저희 내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저희 내외가 지난 한달내내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하는데 우리의 시간과 정신을 낭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창 밖에선 바람막이 비닐자락이 펄럭이는데 촛불을 가운데 두고 마주앚은 우리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해 보였습니다. 자신의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한달간을 불면에 시달렸던, 형편없는 '졸부'로서의 우리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년 전만 해도 나라의 일을 걱정하던 대통령부부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가엾은 모습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날 제가 그 분 앞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 내외는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선 좀 더 적극적인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했습니다.
그것은 작은 동의였지만 저희 내외에겐 '정신적 새출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2월 6일, 음력으로 정월 초하룻날 시작된 '백일기도'였습니다.
새벽 3시 30분 목탁소리를 듣고 일어난 저희 내외는 찬물에 수건을 적셔서 냉수마찰을 한후,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법당으로 들어갑니다. 다기(茶器)에 물을 붓고 향로에 향을 피웁니다. 법당안은 다기에 올린 물이 곧 얼어버릴 만큼 추웠습니다. 조용히 꿇어앉아 스님으로부터 배운 단전호홉을 하면서 종성(鐘聲)을 듣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 옵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잡념을 몰아내기 위해 불경을 큰소리로 외웁니다. 작은 못에 고인 물처럼, 마음이 한곳에 모일 때에만 염불소리가 제 깊은 곳으로부터 나와 울려 퍼지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 내내 몸을 일으켜 일백여덟번 지극한 정성으로 절을 올립니다. 기도는 하루에 세 번씩 올리게 됩니다.

우리 내외의 백일기도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웬만한 정성이나 신심없이는 할 수 없는 기도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토록 어려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야 하는 일, 불경을 외우면서 잡념을 몰아내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는 일, 불기라고는 없는 법당의 한기를 참아내는 일, 매 기도시간마다 일백여덟번 절을 해야 하는 일 등 그 어느것 하나도 쉬운 것이 없었습니다.

백일기도를 시작한 후 저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기도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덜어내기 위한 싸움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영하 27도의 추위속에서도 저희 내외는 기도하기 위해 우리의 새벽잠을 털어내야만 했습니다. 채식을 함으로써 우리의 음식에 대한 탐을 덜어내야만 했습니다. 기도시간마다 백팔배를 드리기 위해 편안히 머물러 있고 싶은 안일한 마음도 덜어 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불경을 외우면서 잡념을 몰아내고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는 바로 그 일이었습니다. 잡념을 몰아낸다는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잡념을 몰아낸다는 것은 곧 제마음속에 터질듯이 차올라있는 분노, 미움, 배신감, 억울함 등을 제 자신으로부터 덜어 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고백드립니다만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 내부에 들어차 있는 수많은 잡념을 몰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어찌된 셈인지 잡념은 먼지처럼 오히려 더 많은 잡념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분노는 또 하나의 분노를, 미움은 더 거센 다른 미움을, 배신감과 억울함도 각각 더 질긴 그 무엇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마치 '선동'과 같았습니다. 분노가 또다른 분노를 선동하고, 미움이 더 거센 다른 미움을 선동하는.... , 그리고 그 혼란한 감정들은 제게 속삭였습니다. "당신이 가진 미움-증오-분노는 정당하고 이유있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전 가슴이 터질것 같았습니다. 그제서야 전 옛 어른들이 말한 그 ;울화병;을 이해했습니다.

제가 지니고 있는 미움과 분노는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신감과 억울함도 이유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적막하기 이를데 없는 이곳에서 미워할 수도, 분노할 수도 없다면, 아니 미워하고 분노할 권리마저 제 가슴속에서 덜어 버린다면 전 죽어버릴 것같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내외가 시작한 그 백일기도의 기도제목은 '국태민안과 영가천도'였습니다.

그것은 곧 나라를 위한 기도를 의미했습니다. 나라에는 번영함을,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지혜를, 국민들에게는 평화를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다만, 처음엔 그 분이 결정한 그 기도 제목이 저에게 너무 벅차게 느껴졌습니다. 그 당시의 저에겐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할만한 순수하고 정갈한 마음의 준비가 돼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에겐 차라리 그 분의 명예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것이 훨씬 더 솔직하고 절박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절박한 심정을 딛고 열심히 기도에 임했습니다. 그것은 나라가 번영하고 국민들이 평안을 누리게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밤을 세워서라도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저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정열이라고 생각됩니다.
백일기도를 시작한 후, 그 분은 점점 안정을 찾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빨리 마음의 편안함을 찾은 후 그분을 도와드려야 할텐데 조급하기만 할뿐 그 어떤 편안함도 찾아지질 않았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혼란을 주체하기 어려웠지만 백일기도에 참석하는 일엔 있는 정성을 다했습니다. 기도란 정신적 고통은 물론 육체적인 인내도 필요하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리게 되니 기도를 끝내고 돌아서면 또 기도시간이었습니다. 절을 많이 하게되니 그 고단함 때문에 입속은 늘 헐어 있었습니다. 삼칠일이 고비라고 하더니 20여 일쯤 지나자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면서 온몸에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뼈마디는 물론 살갗까지도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단한번도 결석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저였지만, 그때는 하마터면 기도에 빠질 뻔 해습니다.

50일째로 접어드니 식욕이 떨어지면서 빈혈증상과 메스꺼움이 몰려왔습니다. 그 증세가 어찌나 심한지 마치 무슨 큰 병에 결린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오랜 책식 후에 온다는 소위 '비윗병'이었습니다.

과연 백일이 되는 날까지 참고 기도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도 되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기도가 중단된다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정진해 보자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무엇인가 뛰어 넘어야 할 중요한 벽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70일쯤 지나자 전 참으로 이상한 것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우선 불편하고 힘들었던 모든 증상들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토록 집요하게 제 마음을 괴롭히던 그 끈질긴 모든 증오와 미움과 배신감과 억울한 감정들이 제마음 저편으로 내던져지는 듯한, 아니 제마음 한가운데로부터 어디론가 힘껏 덜어내어지는 듯한 분명한 변화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70일이 되던 그날, 갑자기 얻어진 무슨 전리품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70여 일이 되던 그 날까지 제가 치뤄내야 했던 그 고단한 '마음의 갈등'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정말 처절할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습니다.

분노와 미움을 덜어내는 일, 그러나 그것은 덜어내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저처럼 수양도 철학도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제 경우에 있어 그것은 '덜어내어진 것'이 아니라 차라리 '도려내어진 것'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같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할 수 있을때만 해도 전 저희내외가 겪고 있는 이 '귀양살이'가 '남의 탓'이라고 돌려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피해자'이고 누군가 '가해자'가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은 변명할 수 있는 자리나마 얻게됩니다. 그러나 그 자리나마 그 미움, 그 분노를 마음으로부터 덜어내고 나자 '빈 마음'은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내탓'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은 제게 참으로 소중한 자각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라앉고 평안해지자 불경을 읽으니 그 뜻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세상 모든 일은 인연에 따라 일어난다,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이 나듯이 언젠가 악한 인연을 지었으니 악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요, 선한 인연을 지었으면 선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했다고 탓하고, 원망하고, 미워하지 말라. 내가 베푼 은혜는 내가 금생이나 전생에서 그로부터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거나 빚을 갚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연기법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과는 순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모든 것을 '제탓이란 생각으로 남을 탓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미워하지 않으려 마음먹은 후에 오는 충만감은 저에게 있어 하나의 축복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이 짓는다'는 말이 그때처럼 가슴을 울려온 적은 없었습니다. '마음의 갈등'을 겪고 난 후에 드리는 기도는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이젠 더이상 분함도, 억울함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미워했던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생겨 났습니다.

그날 이후, 전 기도하는 즐거움에 빠져 들었습니다. 나라의 번영과 국민들의 평안을 위해, 영가들의 천도를 위해, 온 정성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이 지혜를 얻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기도에 빠져 있었는지 어떤 날은 기도를 끝내고 법덩을 나오면서부터 벌써 다음기도 시간이 기다려지곤 했을 정도입니다.

국태민안과 영가천도를 위한 백일기도가 끝나 '회향(回向)하던 5월 16일, 전국에선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오셔서 저희 내외의 백일기도 회향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어려운 백일기도 동안 마음의 갈등으로 절절매는 저를 옆에서 늘 붙잡아 주셨던 그 분께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자신도 가누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이 있었을텐데 언제나 지나치리 만큼 대범하고 이성적이셨던 그 분의 모습은 아내된 저에게 큰 교훈이 되어 주셨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자 저희부부는 갑자기 젊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흘을 쉬고나서 스님들과 함께 봉정암에 올랐습니다. 천불동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사리탑앞에서 저는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목청을 높여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저희는 대청봉으로 오르기로 했습니다. 대청봉의 명성을 들어 알고있었지만 길은 시작부터 험했습니다. 피곤해진 다리를 쉬고 또 쉬면서 정상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바람도 점점 거세졌습니다. 오월 하순인데도 산아래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잔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보였습니다. 소청봉을 지나 중청봉에 이르자 바람의 속도는 더 거세어져 서로 손을 맞잡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가 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나무들은 정상에 이르자 마치 땅에 기는 듯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그 작은 나무들에게서 오랜 세월의 만고풍상을 암시하는 듯한 깊은 연륜이 느껴져왔습니다.

대청봉 정상에 있는 그 작은 나무들의 모습은 저희 내외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키작은 나무만이 생존하고 서식할 수 있는 곳, 몸을 낮춘 겸손한 자만이 머무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삶의 정상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대청봉 정상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힘들게 오른 정상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영원히 머물러있을 수 없었습니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못지않게 정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길이 더 어렵고 힘들다 해도 정상에 오른 사람은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곳은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다만 대통령을 끝내고 청와대에서 나오는 것이 권력의 정상에서 무사히 내려오는 것이라고 저희내외는 확신했습니다. 7년반의 임기를 끝내고 청와대를 떠나 정든 옛집으로 돌아가는 것, 즉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정상에서부터 내려와 '일반시민'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권력의 정상으로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저희 내외는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신이었습니다. 대청봉 정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도중 저희 내외는 정상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금 수많은 깊은 계곡과 가파른 길, 그것은 너무도 위태롭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자 저희 내외가 겪고 있었던 아픔과 괴로움도 모두 다 권력의 정상으로부터 내려오는 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올라갔던 산의 정상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정상에서 내여올 때 만나는 골짜기 또한 깊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대청봉 정상을 내려오는 길목에서 그분은 제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과 내가 가는 이 길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가는 길이오. 경험을 갖춘 안내자도 없는 길이기 때문에 더욱 힘든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오. 그러나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하면서라도 반드시 닦아 놓아야 하는 그런 새 길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오.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갈길을 걸어갑시다"
그 분의 그 말씀을 듣자 저는 비로소 백담사에서 보내야 했던 그 인고의 시간이 저희 두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알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제가 겪어야 하는 이 상황이 어떤 의미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게 된 이상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다만 이 새로운 과제 앞에서 열심과 정성을 다하라는 각오와 다짐만이 제 가슴속에 넘쳐 흘렀습니다.

어느새 저희 내외는 백담사 어귀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저만치 계곡 사이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가 바라다보였습니다.

그러자 '은둔'이라는 이름으로 저희 내외가 백담사로 들어오던 그 첫날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절망감에 싸여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계곡 사이에 놓인, 그 낡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전 마치 세상으로부터 영원히 격리되는 듯한 허망함과 막막함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습니다. 외나무다리 저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백담사를 보자 저는 마치 '정든 집'에 당도한 것 같은 반가움을 느꼈습니다.

그 날부터 백담사는 더이상 우리의 '은둔처'가 아니었습니다. 백담사는 어느새 우리의 정겨운 '안식처'로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아궁이에서 오르는 연기 때문에 문살마다 그을음이 조청처럼 덮여있는 문짝을 뚝 떼어들고 우물가에 나가앉아 한나절 내내 문살을 닦아내는 일도 즐겁습니다.

제손으로 벽지에 풀을 먹여 방에 도배를 하다보면 이십여 년 전 그븐이 중령으로 진급되던 해 처음으로 마련한 내집이 너무나 좋아서 하루종일 제손으로 도배를 하던 그 시절의 행복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방충망을 해달아 극성스런 모기와 등에에게 물리지 않아 좋습니다.

올림픽 이전에 전국 관광지에 짓기로 계획된 공중변소는 그 전해의 물난리로 공사가 두 해나 늦어지긴 했어도 작년부터는 쓸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전깃불입니다. 촛불을 켜고 사는 생활 속에선 책한줄 읽는 일이 어려워, 한때는 식구들이 구해 다 준 낚시등을 놓고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경운기 엔진으로 만든 발전기로 불을 밝혀 보려고 애쓴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1년을 지내다, 전기가 따로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밤새 아랫목에 놓아 둔 대야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던 번거러움도 이젠 끝이 나고 요즘은 비록 고무양동이 속에서 하는 목욕이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6,25 전쟁중에 고생은 물론, 식생활도 해결하기 어려운 그 분의 봉급으로 가난한 신혼살림도 꾸려본 저였지만 좀 살만해지자 만족보다는 불평이 많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혼시절 사과궤짝에 예쁜 도배지를 발라 포개어 놓고 그 속에 내의나 양말을 넣어두던 일, 한쪽 벽에 못을 박아 옷을 갈고는 그 위에 횃대보를 치고 살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그 가난이 그렇게도 행복했었는데, 지난해만 해도 백담사의 그 옹색한 살림이 그토록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니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마음이란 묘한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만나는 사람들도 모두 소중하고 반갑습니다. 깊은 산골에 있는, 이 먼 절까지 온종일 달려와 저희 내외를 찾아주시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수많은 분들의 정성에 가슴에 메어오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폭우로 외나무 다리마저 끊기면 절 옆 험한 청룡재를 넘어와 글썽이는 눈으로 저희 내외의 건강을 당부해 주시던 분들의 정성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적도 많습니다. 그 분이 악수를 청하면 비에 젖은 손을 다시 젖은 옷자락에 닦은 후에야 손을 내밀어 주시는, 그 다감하고 인정많은 분들 앞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표현할 어떤 방법도 찾지못해 저희 내외가 오히려 절절 매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하시곤 합니다.
재임기간중 내가 좀더 지혜가 있고 경험이 풍부했더라면 저 분들을 위해 좀더 잘할수 있었을 것이고 마음 아프게 해드리는 일도 없었을텐데...."
라고 말입니다.

금년 여름에 저는, 절 앞 텃밭에 나가 그 분과 함께 감자도 캐고 오이도 땄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온 비때문에 잎이 물러버려 감자수확이 영 신통칠 않았습니다.

손주들은 작은 감자알이 귀엽다고 탄성을 올렸지만 그 분은 "감자농사가 큰일이구먼"하며 걱정하셨습니다. 감자를 바구니에 담아들고 들어오는 둑길에서 아이들은 그분에게 매달려, 씽씽나는 잠자리랑, 풀숲의 개구리를 잡아달라고 졸라댑니다.

저녁이면 돋보기를 끼고 앉아 그 분이 입으실 한복의 동정을 갈아드리기도 하고, 다른 일이 없으면 그 분을 모시고 절 식구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기도 합니다. 그 분 곁에서 저도 이럭저럭 참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막내아들이 대학입시에 떨어진 아픔도 있었고, 둘째 아들이 아끼던 며늘아이와 헤어지는 슬픔도 있었습니다.
슬프면 울기도하고, 고적하면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편지를 쓰기 위해 무릎앞에 당겨놓은 작은 밥상 하나까지도 정겹습니다.
청와대의 생활이 저에겐 그토록 소중했던 것처럼 백담사의 생활도 제겐 소중하고 귀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니 청와대 시절, 미처 배우고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것들을 저는 이곳에서 다시 배우고 다시 깨달아 갑니다. 그런 이유로 제 추억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마 청와대시절이 아니라 백담사 생활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백담사의 겨울 준비도 이미 끝났습니다. 여기저기 바람막이 비닐도 치고 베니어판을 몇장 사다 이곳저곳 허술한 곳을 막아놓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되어 눈으로 길이 막히면 이곳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됩니다. 사람의 출입은 물론 전화조차 두절돼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이면, 열심히 기도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먹을 갈아 소중한 글귀도 써 보고 아이들에게서 온 편지를 그 분께 읽어드리기도 할 생각입니다.

청와대를 나오던 날, 그 분의 팔에 안겨 인희동 집으로 돌아왔던 손녀딸 수현이는 어느날 백담사에 있는 저를 보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집에서 안 사시고 여기서 사세요?"
먼 훗날, 그 손녀 딸에게 저희 내외가 왜 청와대를 나온 후에도 정든 집에서 살지 못하고 백담사로 나와 살아야 했는지, 그리고 백담사가 저희 내외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지를 잘 말해주기 위해서라도 전 이곳에 있는 날까지 그 분을 모시고 열심히 정성을 다해 살아갈 생각입니다.

지난 두 해 동안 어떤 때는 분노로, 어떤 때는 연민으로 저희를 지켜보아 주신 많은 분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송구함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법당에선 지금 저녁기도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려옵니다.



1990년 동짓달




백담사에서 이 순 자

시사코리아저널  webmaster@koreajn.co.kr

<저작권자 © e시사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시사코리아저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개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 1
  • 2
  • 3
  • 4
  • 5
여백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