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유공자 선정에 대한 재평가와 재심이 필요하다 |
| 왜곡과 조작으로 기록된 민중항쟁 사적비가 세워진 이유는? 광주사태 VS 나주사태 나주시 남내동 남고문(지방문화재)네거리 인도에 5.18민중항쟁을 기념하는 사적비가 세워져있다. 바둑판 크기의 대리석 동판에 새겨진 비문에는 "이곳은 5.18 민중항쟁 당시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의 주요 거점지 였으며, 시위대 및 시위차량들이 주요 임무를 부여 받았던 곳이다"는 내용과 함께 "계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시민군들이 주.야로 경계근무를 섰던 곳이다"로 새겨져 있다. 이어 "김밥과 주먹밥 음료수 등을 시민군들에게 무료로 제공 민중항쟁을 지원하였다'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황당한 사적비를 세운 5.18단체 관련자는 질문에 답을 하라! 질문1-1980년 5월18일 시작한 광주사태는 전남도청(광주)앞 금남로 일대에서 발생 했는데 왜? 나주 남고문 일대가 시민군의 주요 거점지가 되었는지 선명하게 대답하라! 질문2-1980년 5월18일자 시작된 광주사태는 광주시 전역에서 발생한 대학생(전대)들의 시위와 데모를 진압하기위해 광주의 향토사단 병력이(계엄령 선포)광주시 일원에서 진압 임무를 수행했는데 황당한 사적비에 새겨진 비문에는 “나주에서 계엄군 진입을 막기 위해 주.야로 경계근무를 하였다‘기록되어 있는지 조작한 이유를 소상히 밝혀야 한다. 질문3-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는 하룻만인 5월 19일자 전남지역 38개소 무기고 가운데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와 나주경찰서 무기고가 최초로 피탈되어 3만 나주 읍민들은 문을 굳게 닫고 모든 상가가 철시를 했는데도 주민들이 김밥 주먹밥 음료수를 제공했다는 황당한 내용의 비문을 새겨 놓았는지 선명하게 대답하라! 질문4-1980년 광주사태 당시는 나주에 몰려온 서남부지역(목포 무안 함평 진도 영암)등 복면으로 얼굴을 감춘 수백명의 무장 폭도들의(각목 쇠파이프 소지)나주진입으로 나주 주민들은 대문을 굳게 닫고 상가들은 철시하고 읍민들은 피신을 했는데, 30년이 흐른 지금은 나주지역의 5.18민중항쟁(국가유공자)들이 200여명이나 보훈처에 등록되었다는 사실이 황당하질 않는가? 국가보훈처는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광주 전남 지역 4200여명의 5.18 국가유공자와 나주지역 200여명의 등록된 국가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재심사할 것을 촉구한다. 필자는 1980년 5월 19일 광주사태 당시 폭도들에게 쫒겨 피신 온 지역담당 보안사 주재관과 나주경찰서 소속 0모경찰관과 함께 피신 중 "유신 언론인은 죽인다"는 협박에 나주예비군대대로 피신, 대대를 기습하려는 폭도들을 상대로 16명의 대대 현역병들과 함께 민간인 신분으로 진압군의 일원이 되어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김동문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http://allinkorea.net/] 광주사태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김동문 전 전남매일신문 기자) (다음의 연재는 김동문 기자의 허락 하에 시사코리아저널에서 퍼온 것입니다) 광주가 민주화운동의 성역인가? 암울했던 1980년 5월. 광주 인근 소도시 에서 무장 시위대와 대치 했던 9일 동안의 악몽을 기록한 빛 바랜 수첩을 정리해 본다. 필자는 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동에 자리잡은 전남 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에서 기동취재 팀장으로 일선 시,군의 현장 기동 취재를 주로 맡고 있었다. 석간에 발행되는 신문들은 오전중 초판 제작을 끝내려고 편집국은 온통북새통이 된다. 오전 11시 30분 마감시간이 되면 일선 시, 군에서 보내온 사건 사고들을 전화로 송고 받아 기사작성, 편집부를 거쳐 초판 제작이 되기까지, 아침 편집국의 모습은 영낙없는 시골 장터의 풍경이다. 마지막 원고를 편집부로 넘기고 5층 구내식당을 들어서자 이부장의 우스게 소리가 들린다. "전경들 1보 전진은 이쪽 테이블로" "학생들 2보 후퇴는 저쪽 테이블로" 700원짜리 점심값 내기 즉석 게임이다, 이틀 전 16일부터 시작된 대학생들의 "계엄철폐"시위 행열로 시가지 도로가 어수선하자, 기자들은 대부분 옥상에 있는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있다. 회사 5층 옥상은 도청 앞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어제 보다 두 배나 불어난 전경들이 방패와 진압봉을 앞세우고 2열 횡대로 도청 정문과 주변 담 장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시위대와 5미터쯤 간격을 두고 밀리고 밀어내는 줄다리기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 옥상의 구내 식당이라 요즘은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오전 원고 마감이후 "해상왕 장보고"기획물 취재를 위해 완도 출장 길을 준비하던 차 갑자기 국장실에서 대기 지시가 떨어졌다. 계엄령 선포로 5월의 정국이 불안한 터에 서울에 이어 광주시내 대학가가 술렁이며 계엄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잇따라 편집 마감시간도 들쑥 날쑥해 취재팀들은 모두 비상 대기 상태에 놓였다. 외근 기자들이 저마다 출입처로 떠나고 내근인 편집부와. 교정부, 그리고 시군 지방을 맡고 있는 2사회부 소속 기자들이 사무실에 남아 저마다 계엄정국의 향방을 화두로 나누며 18일오후도 특별한 사고 없이 어느듯 퇴근 시간이 되었다. 18일 오후 7시께 회사 정문을 나서자 도청 앞에 정렬한 전투경찰 병력 규모가 대학생들의 도청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방패와 진압봉을 든 체 눈에 띄게 불어났고 수백 명의 시위 대학생들은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조선 대학교 방향으로 질서 정연하게 행진해 나간다. 어둠이 깔린 밤8시 조선대학 광장에 집결한 학생 시위대는 평화적인 횃불시위를 끝으로"계엄철폐"구호를 외친 후 해산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버스터미널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일 19일은 완도 주재기자의 요청으로 완도 항 개발에 따른 종합대책의 허구성을 취재 하기 위해 완도출장을 나서기로 한 후 밤 10시께 집으로 돌아왔다. 1980년 5월 19일 아침 8시경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류장 입구에 이르자 대합실과 광장은 빽빽이 들어선 인파와 버스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체 나주경찰서 보안과장 0경감이 전투복 차림으로 호각을 불어대며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상, 하행선 버스를 전면 통제하는 바람에 정류장은 버스들로 가득 뒤엉켜 통학생과 출퇴근 공무원들의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급히 0경감 곁에 닥아서 '무슨 일이오" 묻자 그는 호루라기를 물고 광주행 버스들을 향해 진입을 차단하고 있다. 하룻밤 사이 폭동으로 뒤바뀐 광주! (19일.출근길에) 전투복차림의 보안과장에게 "무슨 일이요? "묻자 그는 호각을 입에 물고 "전남도경의 지시로 광주 진입 차량을 통제한다" 고 한다. '무슨 일로 요?' 라고 되묻는 찰라에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난 듯 합니다"라는 뜻밖의 소식을 알려준다. 어젯밤 평화적인 횃불시위로 조선대학 광장에서 해산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데 하룻밤 사이에 폭동이라니... 정류장 광장과 대합실은 광주로 출근하려던 직장인과 학생들 그리고 서남부 11개 시, 군에서 광주로 향하던 많은 승객들이 웅성거리며 발을 동동 구른체 사태를 파악을 하느라 분주하다. 곧장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등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김 차장 여기서 뭣하고 있는가?" "광주에서 계엄군들이 학생들을 마구 죽이고 있다는데..." 선배 0씨가 상기된 모습으로 웅성대는 군중들을 향해 열변을 토한다. "나주인 이여! 광주로 갑시다". 지금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총칼에 수많은 학생들이 죽어간답니다. "광주로 갑시다" 40대 후반인 그는 "민주회복 국민회의"란 김대중의 외각단체로 알려진 재야 운동권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어 나는 야당 정치권이 개입된 사태로 판단, 도망치듯 1키로 떨어진 집을 향해 무작정 뛰었다. 즉시 전화통을 붙들고 광주 본사로 다이얼을 돌렸다. 상냥한 목소리의 0양이 아닌 총무국 소속 윤 기사가 전화를 받는다. 윤 기사는 황급한 목소리로 "김 차장님 큰일났습니다". 회사에 계엄군이 들어와 있으며, 편집국 기자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습니다." 나는 윤기사의 대답에 어이가 없어 윤기사에게 "차량이 통제되어 출근을 할 수 없으니 회사소식을 수시로 알려 달라'는 당부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윤 기사와 통화를 끝으로 본사와 연락은 두절되고 광주의 소식은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 <2회> 광주와 통신이 중단 되고 나주경찰서가 피습 되더니.. 정류장에서 보안과장이 귀뜸한 "광주의 폭동" 정류장 광장을 메운 승객들을 향해, '나주인이여! 광주로 갑시다, 지금 광주에선 계엄군이 학생들을 마구 학살하고 있습니다'라는 선배의 열변에 놀라 집을 향해 마구 뛰었다. 허겁지겁 사무실에 도착.경비전화를 들었으나 교환의 응답이 없다. 사무실 마즌편 보안사 주재관의 숙소에서 나주경찰서와 연결된 경비전화를 들었으나 응답이 없다. 경비전화 마저 불통이라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별의 별 생각이 든다. 광주에서 전쟁이라도 터진걸까? 19일 12시정각, 사무실의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재 빨리 수화기를 들자 낮익은 음성이 들린다. "서울지사 오 부장이요" "본사 전화가 불통인데 광주 소식 좀 알려주시오." 한 시간 전 총무국 윤 기사와 통화한 후 나주와 광주간에 통신이 중단되어 나 역시 광주에 폭동이 났다는 소식이외 아는 게 없소" "오 부장이 서울에서 합동통신의 뉴스를 받아 내게 알려주시오"되려 서울에서 광주 본사소식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와 나는 각각 서울과 나주에서 전화를 이용 본사역할을 하자고 약속했다. 오부장은 서울지사 팀장으로 국무총리실(신현확)을 출입하는 동료 기자다. 전남지역 2개 지방지 가운데 전남일보는 사주인 0 회장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청와대 출입을 했으나 우리신문사는<전남매일> 총리실까지만 출입이 허용되고 있어 총리실과 합동, 동양등 2개 통신사의 뉴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 이었다.. 오부장 역시 서울-광주간 전화두절로 나주에서 발이 묶인 나와 똑같은 입장이다. 초조와 불안감속에 갑자기 경찰 경비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수화기를 집어들자 "경 무 과장 김 00입니다. 보안 대장님 계십니까?" "나주 경찰잔여 인원은 지금 철수합니다. 현재 폭도들에 의해 점거 당했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전화가 끊겼다. 벽시계를 쳐다보니 19일 정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광주에서 27키로 거리인 나주경찰서가 광주 차량 통제이후 3시간만에 폭도에게 피습 당했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아침 보안과장의 입 소문으로 들었던 광주의 폭동. 3시간만에 나주경찰서까지 점거 되었다니 이건 단순 소요나 폭동이 아닌 북괴의 남침이란 생각이 든다. 7살 유년기에 6.25동란을 겪었고 66년 월남전에 참전했던 지난날의 경험으로 미뤄 사태의 심각성에 불안해 진다. 단순 폭동으로만 들었던 광주사태. 각목과 쇠파이프.그리고 탈취한 총기로 무장한 폭도들에 의해 나주경찰서가 피습 점거되었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불안감이 온몸을 스쳐온다. 사무실 앞 국도<신의주선1호 광주-목포>를 질주하는 버스에는 각목과 몽둥이,그리고 칼빈소총으로 무장한 장발의 폭도들이 시가지를 질주하며 차량들이 점차 불어나고 있다. 이 때 사무실 입구에 사복차림의 정보과 0 경장이 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들어선다. 경찰서가 피습되고 무기고도 털리고 저마다 피신처를 찾아 나를 찾아 왔다 한다. 사복으로 바꿔입고 골목길을 더듬어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19일 12시 40분.전화벨이 울렸다. "김 차장 빨리 대피하시오. 총리실에서 접한 소식은 광주지역 방송국 은 물론 우리신문사도 피습되어 불에 타고 있다는 거요. 지사 간판도 내리고 피신하시오"라는 오부장의 격앙된 음성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3회끝> 1980년 5.19일 오후3시 처음 무기고가 피습되고 1980년 5월 19일 오후3시-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가 피습되고 1600여정의 총기가 탈취되던 날! 사납게 울리는 전화 벨소리에 수화기를 드니 서울지사 오 부장의 다급한 목소리로 "김 차장 빨리 대피하시오. 서울에서 접한 소식은 광주지역 방송국 은 물론 신문사도 피습되어 불에 타고 있다는 거요. 지사 간판도 내리고 빨리 피신하시오"응답도 못한 체 전화가 끊긴다. 사무실 기둥에 걸린 간판을 떼려고 현관 문을 나서는 찰라에 요란스런 함성과 굉음소리에 놀라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신의주1호선인<광주-목포>도로에는 삽시간에 각목과 쇠 파이프 그리고 칼빈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한 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장발족의 청장년들이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체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 신현확은 물러가라!"는 구호의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탈취한 버스들이 목포 와 영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박경장과 유리창에 새겨진 신문사 제호를 떼다 말고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박 경장이 200미터 전방에 있는 금성동파출소 옆 예비군 무기고를 걱정 한다.그곳은 나주읍내에서 예비군 무기가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경비전화는 불통이고 일반 전화로 금성동 파출소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다. 아마 파출소 경찰들도 이미 철수를 한 모양이다. 제발 총기나 은닉하고 철수 하였기를바라는 마음이다. 이 때 광주 아시아자동차(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한 군용트럭이 사무실 앞을 질주하며 파출소 쪽을 향해 굉음을 내며 달린다. 파출소 방향으로 질주하던 군용트럭은 갑자기 무기고 부럭 담장을 향해 돌진, 무기고를 박살 내고 있다. 19일 오후 3시, 곧바로 요란한 총성이 들려온다. 이 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여니 겁에 질린 보안대 주재관 0 준위가 사무실 문턱에서 자신의 허리춤을 만지며 권총을 찾는다. "내 권총! 내 권총!" 빈 허리춤을 더듬으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오른손을 흔든다. "이 사람 정신차려"어깨를 감싸며 진정을 시켰다. 박경장이 건네준 냉수 한 컵을 단숨에 마신 그는 "김대중의 내란 폭동이야"외치며 정신없이 도망쳐온 경위를 설명했다. 이 준위가 나주군청 군수실을 찾아가 유군수를 금성산 5포대로 피신토록 한 후 군청 정문을 나서는데 몽둥이와 각목을 든 20여명의 청장년들이 군청 앞 에 몰려 있고 그 중 낯익은 30대 후반의 대장 격인 듯 한자가 지휘를 하는데 그는 나주 사람도 아닌 함평 사람으로 유일한 김대중의 지지자로 재야 활동을 한 사람이며, 고향에서도 유관기관을 떠돌며 활부 책장사를 하며 평소 자신과 호형 호제하던 사이인데도 이날 따라 몽둥이를 든 체 "어이! 보안대장 어디 가는가?" 라며 정색을 하자 이에 놀라 500미터 거리인 이곳까지 2키로나 골목길을 헤매며 줄달음쳐와 사무실 앞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이 준위에게 금 파 무기고가 조금 전에 피습된 경위를 알려줬다. 그는 예비군 대대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들려온 소식은 충격과 함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습 당한 무기고에는 M1, 칼 빈 소총 1600정. 중화기인 M60기관총과 수류탄이 든 상자 등이 보관 되 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다. 정확히 무기고가 피습된 시간은 5.19일 오후 3시다. 사무실에 묶인 우리 세 사람은 긴장된 상태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이때 전화 벨소리에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서울지사 오 부장이다. "김 차장 긴급 상황이요 지금 광주 본사가 불타고 있고 본사 식구들도 이미 철수했으니 김 차장도 빨리 대피하시오" 청천 벽력같은 소식에 우리 세 사람은 기겁했다. 우선 함평이 고향인 이준위가 함평지역 무기고를 수습하기위해 출발을 서둘며 나주 역으로 전화를 했다. <4회끝> 유신 언론인! 방문할테니 기다려..협박전화에... 윤전기가 멈추고 신문제작이 중단 되던 날 (80년 5월19일) 마지막 통학 열차의 운행 여부를 모른체 이준위는 사무실 옆 담을 넘어 역을 향해 떠났다. 경찰서가 이미 폭도들에게 점거된 터에 경찰관인 박 경장의 신변이 걱정 되었다, 읍내에서 4키로쯤 떨어진 금천면이 그의 집이다. 그는 혼자 남게 될 내가 걱정 된다며 피신을 거절한다. 이때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 왔다. 마치 피난민의 행렬처럼 편집부 이차장의 일가족 다섯 명이 젖먹이까지 않은 체 황급히 사무실로 들어선다.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은 세 살 젖먹이를 등에 업고 양손에 가방을 든 모습이 영락없는 피난민 모습이다. 이 차장 일가족의 모습에서 광주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다. 광주소식을 들을 겨를도 없이 부인과 애들을 3백여 미터 떨어진 안집으로 안내한 후 광주의 사정을 들었다. 그는 19일 아침 회사에서 벌어진 상황들을 차분하게 전해 준다. 아침 8시께 회사 정문에 도착하니 향토사단 소대병력이 정문에 배치되어 신문사 출입자들을 통제하고 있고 편집국에 들어서자 편집국장의 주재로 비상회의가 열리면서 부사장의 최종 결정에 따라 19일자 신문발행이 중단되고 전 직원은 일체의 신분을 숨기고 각자 집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사장(심상우)은 독일 언론사와 자매 결연으로 외유 중 급보를 받고 일본 공항에 발이 묶여 부사장이 신문 제작 중단을 결정했고 가족과 함께 처가인 완도를 가던 중 나주에서 버스가 중단되는 바람에 나를 찾아온 이유였다. 이 차장이 왔기에 세 사람 중 박 경장의 피신을 서둘며 뒷문을 나서는 순간, 옆집 식당 쪽에서 총성과 함께 젊은이들의 발자국소리가 웅성 거린다. 20대 중반의 장발족,서너명이 예비군 무기고 에서 탈취한 총기로 . 허공을 향해 공포를 쏘는 바람에 우리 세 사람을 더욱 두렵게 한다. 저런 무리들이 무기고를 약탈 했다면 이건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폭동이자 반란이다. 서울 지사 오 부장의 피난하라는 소식과 광주에서 신문사가 불타고 있다는 게 사실 같다. 아침나절 정류장에서 전투복 차림으로 만난 보안과장이 전해준 광주폭동 소식과 일치한다. 치안을 담당할 나주 경찰서까지 피습되고 치안부재의 상태에서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세 사람은 두꺼운 벽 쪽으로 몸을 피했다. 19일 오후8시 무렵 어둠이 깔리자, 박 경장을 십리 남짓한 그의 집으로 보내고 사무실은 이 차장과 둘만 남아 있었다. 밤 9시께 전화 벨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서울 소식인가 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거기 유신 언론인 집이지 방문 할 테니 기다려" 험악한 목소리의 협박 전화가 쩌렁쩌렁 울린다. 시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내게 "별일이야 있겠는가"라며 그가 내신변을 걱정을 한다. <5회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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