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추도식에는 약40여년만에 미국에서 사는 유족들이 방문하여 추모객들의 눈시울을 더욱더 뜨겁게 했다.
|
서상섭(전,국회의원)의 사회와 이부영 전의원의 추도사로 시작되었다. 그는 추도사에서 경술국치100년, 광복절65주년을 맞이하여 장준하 선생의 뜻과 조국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천안함 사건및 남북관계가 악화일로 가는것에 우려를 표명했고 남북은 한쪽의 일방적 흡수통일은 또다른 비극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방적 통일은 반쪽은 중국에 그냥 넘겨줄 수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남북관계는 평화공존으로 유지하고 남쪽에서는 쌀이 남아돌아 가축의 사료를 만들면서 북쪽의 민족에는 지원을 하지 않는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통일자금이 4천억원이 있는데도 북쪽에 인도적지원을 하지 않는것은 한반도를 위협적 조건으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김정일 독주체제는 잘못되었지만 수천만의 민족이 무슨 잘못이냐? 남쪽은 북쪽에게 인권과 인도적 지원을 아낌없이 해야 쌍방합의 통일이 되는것이 후세들에게 완전한 통일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곧 장준하선생의 뜻이 아닌가 하고 목소리를 높혔다.
1975년 장준하선생 의문사
ㆍ죽어서 빛이 된 ‘행동하는 지성’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죽어서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갈 길을 밝혀 주기 위하여 잠시 숨은 것 뿐입니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상징인 장준하 선생(1918~75)의 영결 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를 추모하며 이 같은 강론을 했다.
|
정부는 등산에 나섰다가 하산길에 실족, 추락해 숨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그 때도, 지금도 적다. 추락사임에도 신체에 골절상·찰과상 등이 없는 점 등 음모에 의한 타살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의 죽음은 3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거대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믿는 가장 큰 근거는 그가 당시 정권에 ‘빼내야만 하는 눈엣가시’였다는 점이다. 독재권력에 맞서 그는 꺾이지 않는 의지로 민주주의와 자유, 민권을 외쳤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일제에 학병으로 끌려가 탈출,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다 귀국한 그는 한때 김구 주석을 도왔다. 이후 53년엔 한국 지성사에 빛나는 ‘사상계’를 만든다. 당대 지식인 사회의 등불이었던 ‘사상계’는 권력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밝혔다. 언론통제 등 왜곡된 현실 속에서 매서운 비판의 날을 세웠고, 5·16 쿠데타나 한·일 국교정상화 등의 실체와 그 문제점 등을 알렸다.
특히 유신에 대한 그의 활동은 정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73년 12월 그는 유신헌법의 잘못을 지적하며 유신헌법 개정에 나선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이다. 서명운동을 이끌던 그는 결국 생애 9번째 투옥당한다. 74년 12월 병보석으로 출감한 그의 의지는 여전했고, 결국 그해 8월 의문사한다.
그와 뜻을 같이한 동료·선후배들은 추모비문에서 그를 “빼앗긴 민주주의의 쟁취, 고루 잘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라면서 언젠가는 그의 뜻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돌베개’에서 처럼 결국 그의 뜻은 이뤄지리라는 믿음이다.
오늘 다시 그의 죽음을 기리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회와 민족에 대한 그의 삶이 더욱 귀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경향신문]
다음은 [한겨레 <길을찾아서> 막무가내 3류소설 ‘장준하 실족사’ / 정경모의 글 발췌]
|
당시 경찰이 발표한 사건의 전말을 항목별로 써내려가 보면, 일행 45명 속에 ‘김용운’이라는 인물이 증인으로 나타나는데, 장 선생 측근들 말로는 이 사람은 원래 일행에 없었고 우연하게 버스 정류장에서 합류한 ‘의문의 인물’이외다. ‘김’은 선거 때 장준하 사무실을 드나들던 사람으로 장 선생과 안면은 있으되 2~3년 동안 만난 일이 없으며 당시 뭘 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무도 몰랐거니와, 경찰 발표로는 중학교 교사라고 되어 있으나 어느 학교인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외다. 아무튼 경찰 발표를 항목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외다.
① 일행이 목적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 반. 등반대 일행은 약사봉 샘물터에서 점심식사 준비를 시작하였는데(시간 미상), 장 선생은 그냥 계속해서 산길을 오르셨고, 그때 장 선생을 따라 같이 산길을 오른 사람은 김용운 한 사람뿐이었다.
② 장 선생과 김용운은 약 2시간 계속해서 산길을 올라갔는데 길이 너무 가팔라져 더는 오를 수가 없어 동료들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샘물터를 향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③ 30분쯤 내려오다 보니 경사가 75도쯤이고 높이가 12m가량인 비탈길이 있어 장 선생은 그 비탈길을 내려가려고 낭떠러지 위의 소나무 가지를 손에 쥐었는데, 어쩌다가 그 소나무 가지를 놓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④ 김용운은 우선 가까운 군부대를 찾아가 사고를 알리고(부대까지의 거리는 미상) 그다음에 샘물터로 돌아와 사고가 난 것을 통보하였다.
⑤ 등반대 일행은 전원 버스 정류장을 향해 산을 내려가고 그중 두 명만이 김용운과 동행하여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서 장 선생의 사망을 확인하였다. 그때 김용운은 장 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등산객에 의한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이 경찰의 공식 보고인데 이건 누가 보아도 전후가 맞지 않는 얘기고, 김용운 자신이 공범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자백서나 마찬가지 아니오이까. 나중에 알려진 가족들의 증언과 친지들의 현장답사 결과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밝혀졌소이다.
① 장 선생의 치명상은 오른쪽 귀의 후부를 뚫은 2인치가량의 두개골 파열이었고, ② 경사 75도의 암반에서 굴러떨어졌다 하는데도 체중 73㎏의 장 선생 신체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으며, ③ 의복도 말짱한 채로였고 찢긴 데가 없었다. 따라서 실족해서 돌산 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④ 소나무 가지라는 것은 떨어졌다는 장소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 그것을 잡으려 했다는 것도 픽션이려니와, ⑤ 김용운이라는 자가 장 선생과 같이 두 시간을 걸어서 산꼭대기를 오르려다 단념하고, 30분가량 하산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왜 그자는 곧바로 샘물터로 오지 않고 군부대를 찾아갔나?
아무튼 그날 오후 6시 장 선생께서 돌아가셨다고 집으로 와서 통고한 것은 경찰이었고, 등반대 중에 얼굴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같이 갔던 사람들이 어떠한 공포 분위기에서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사건에 관해 ‘의문이 있다’는 기사(<동아일보> 75년 8월 19일치)를 쓴 성락오 기자는 잡혀 들어가 곤욕을 치렀고, ‘야당 지도자의 괴사’를 타전한 외신기자 로이 황은 10월 3일 한국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소이다.
내가 일본에 앉아 있으면서 ‘장준하 실족사’에 대해 여기 쓴 것과 같은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언젠가 말한 미국 청년 린 마일즈를 통해 함석헌 선생께서 그때의 상황을 상세하게 내게 알려오셨기 때문이며, 이를 토대로 쓴 장 선생 추도문 ‘장준하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나’는 그해 <세카이> 12월호를 통해 발표되었소이다.
김구 선생께서 흉탄을 맞고 비명에 돌아가셨을 때, 가슴을 치면서 우리는 모두가 김구 선생이 가신 길을 걸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장 선생은, 문자 그대로 김구 선생이 가신 길을 걸어가신 것인데, 문익환 목사께서 그 뜻을 이어 장 선생이 가신 같은 길을 걸어간 것이니, 참말로 이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이오이까.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
시사코리아저널 webmaster@koreajn.co.kr
<저작권자 © e시사코리아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