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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파 故 金大中 정치의 非양심사 추적김 전 대통령을 눈먼 맹신자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인가, 영웅인가?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10.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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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부분 중 역시 그의 불굴의 신념과 소신이 살아 숨쉬었던 독재정권과의 투쟁사가 빠질 수 없다는 점에서 한 정치인에 입장을 넘어선 인간승리로 평가함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과거 그에 확고한 의지를 가혹하게 짓밟은 독재자들이 저지른 망국적 비극과 돌이킬 수 없는 만행에 대해 고인은 물론 수많은 피해자를 희생시킨 민족범죄로 처단해서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겼던 많은 영혼들을 달래고 민족앞에 냉엄한 심판이 되었어야만 함인데 그렇게 되질 않은 건 역대 정권들에 정치협작에 상생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이라 판단니다. 확실한 처단을 기피하고 정치에 역용되는 가식적 사법쇼로 막을 내렸으니,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함께 피흘린 민중들의 가슴 속에 한이되어 이를 원망함으로 깨끗이 청산하질 않은데 대해 반세기 역사를 강탈당한 백성의 입장에선 그가 대표적인 인물로써 주목받아왔던 바, 한 시대를 국민들과 함께한 그에 정치와 삶은 그야말로 산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이나라 민주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점과 남.북에 6.15공동선언을 통해 냉각정세를 과감히 녹여 화해무드가 흐르게 하는 햇볕정책 추진으로 조국통일 문제를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로 호평받는 것에 아무도 이의가 없어 보입니다.

그 외에 다른 부분도 긍정적인 성과도 많이 있다는 것도 좋게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언론들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경쟁하듯 앞다투어 크게 포장(장점부각)화로 보도 하면서 많은 국민들이 고인에 장례를 통해 추모하는 열기가 더하여 너무 지나치게 우상화로 유행처럼 몰아갔는지라 안타까웠습니다.

좀더 냉철하게 객관적 사실관계를 보면 고인에 정치적 오류나 모순점 또한 언급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가라 할 수가 없기에 보다 공평하고 정확한 기준을 갖고 어두운 면도 과감히 드러낸 그 비판론을 자연스럽게 정리해 분명하게 구분하여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공동선언 고별오찬 건배 사진.


분명한 사실은 역대 독재정권들과 목숨걸고 투쟁해온 점이 진보정치 또는 민주화 세력에게는 대부로 추앙을 받겠으나,그는 친미주의자였고 친미정치인으로서 성공을 거둔 인물로 결코 민족주의자는 아닌 것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고인이 미국, 일본 제국주의에 협조하지 않고 오로지 민족적 자주정치로 치닷는 백범(김구)선생의 길을 갔더라면 그들도 살려두진 않았을터, 미군철수와 보안법폐지가 가장 우선시된 정책이 됐을텐데, 기대와는 달리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패권에 몰입하는 과오를 범하면서 대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손에 쥐게 된 것도 결국은 역적들과의 야합에서 얻은 비굴함은 과거 민중을 짓밟고 주권을 강탈한 세력들과 손잡은건 서로 이익을 놓고 거래함이 있는 권력결탁을 했다는 것이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굴욕적인 한일협약과 독도파괴를 주장한 JP와 결탁해 야합한 것은 이완용과도 대선표만 준다면 가능하다는 결론인데, 김종필이 누구입니까? 박정희 쿠테타군 지휘관으로 오른팔 역활을 했던자로 나라를 강도질 하여 빼앗은 역적놈이 분명한데, 이완용은 마다할런지, 전두환, 노태우 등도 물밑 작업을 시도해서 정치자금도 많은 도움을 받은건 서로 뒷보장을 사전거래 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한 것인만큼, 국민이 모르게 뒷거래로 역적들과 대선에서 쟁취할 권력장사 했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만고에 한을 안겨준 일본,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지 않고 패권정치를 추구한 점에서 확연이 나타났고 이를 불가론으로 일축하는 정책을 펴 미국의 입장에 발맞추어 절대적 자주정치가 아닌 소리만 요란하게 이벤트성 행사로 알맹이가 빠진 허울좋은 정치술에 불과했습니다.

용서와 화합이라는 것은 역으로 정치적 이익을 추구한 계산된 것


▲ 2009년 8월 14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했을때 사진.
아직도 맹신하는 국민들은 그를 영웅시 하는 우상화에 빠져 정확한 실상은 뒤로한 채 몇가지의 단면만이 부각된 편의적 시각에서만 단순하게 판단하여 유행가 처럼 받드는 어리석은 양이 되가는 것 같아서 뭔가 신봉자로 전락된 모습을 보인 현상은 결코 사실역사를 사회과학적 분석으로 전문적인 진단이 아쉬운 부분이며 보다 정확한 김대중 정치사에 대해 객관적 사실만을 다각도에 평가를 귀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통령 자리에 앉고보면 누구도 미국에 압박을 받게 되어있다는건 잘 알고 있지만, 그도 역시 패권욕에 더 강한 정치꾼이었지 민족애로 목숨건 독립군은 아니었다는 것은 그의 입장도 정권자로 대통령 직무자라는 점에서 이해하는 풍토가 대부분인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전두환을 용서와 화합이라는 평화의 메시지로 이용한 점도 결국 역으로 정치적 이익을 추구한 계산된 용서인데, 전두환 정권에 피해당한 피해자는 고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목숨들이 한을 품고 있음을 망각하는 행위를 범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서양종교 신앙 생활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왜 다른 피해자들도 많은데 자신만 용서하면 그만인겁니까?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이완용도 고인 자신이 아닌 다른 전직대통령 한 사람도 용서하면 그만이라는 국민무시된 착각속에 빠진 모순점은 어떻게 설명이 되겠습니까? 정치적 이익에 급급한 정권자 입장이 되다보니 용서와 화해무드로 가는 정책은 다른 정권들도 마찬가지로 대통령 입장은 결코 한맺인 민중의 한은 한낮 물거품에 지나지 않은건지 원망스럽고 역적도 표밭으로 바꾸어먹은 정권욕에 사리분별을 의심받는건 당연합니다.

미국 제국주의 양키군대가 세계 곳곳에 주둔하고 약소국들을 점령한 상태에서 내세우는 평화론이 모순이 아니라고 한다면 양키군대는 환영받을 평화군으로 전 세계의 모든 민족국가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영구히 막강 군사력으로 지배(무력행사)하려 할 터인데 이나라 한국 정권들이 이를 내치(미군추방)려 하지 않는것은 쿠테타 정권이나 민주정권이란 자들이 하나같이 자신들에 정권유지만을 위해서 결코 시도조차 하려들지 않았음은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도 이런 맹락에선 예외가 될 수 없다는 평가를 피해가긴 어렵다고 봅니다.

김대중의 과거 정치사

고인의 넋을 비는 온 국민들에게 잘못 부풀려진 우상화 풍토를 언론들이 너무나도 화사하게 포장하는 인물정치사, 그 진실을 찾아서 진실한 재평가로 냉철하게 새로 인식 할 필요는 없을까 하는 맥락에서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자 지명 경선과정은 그 본질 즉, 보수ㅡ진보 또는 좌ㅡ우 정치가 야바위패들처럼 비정함과 권모술수로 얼룩져 두 얼굴을 나타냈고, 권력다툼이야말로 동물적인 조직싸움 양상을 띤 야수들이 벌여 온 야만성도 재평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민족 대화합과 자주적 평화통일에 이중성을 지적함에 있어 만일 우리민족이 정녕 통일을 이루려는데 가장 시급하고 우선시 되어야 하는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가 가장 큰 걸림돌임은 분명한 현실이건만, 친미파인 김대중은 이를 불가론으로 일축한 채 평양 6.15공동선언을 추진한 저의는 그야말로 무지개쇼 같은 대형 이벤트를 통해 정치적 성과나 명예(노벨 평화상)를 우선시 했다는 겉치레적 국민기만은 아닌지, 돼짚어 볼 사안임에 결국 뒤에서 미국이 주도하에 배후조정당하는 꼭두각시 역활만을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외국군대인 유일한 점령군 양키군이 반세기가 넘도록 이땅에서 철수하지 않고 지속해 신무기 전투화를 추진하며 반공의 국가보안법이 장 그대로 국민들을 억압하는 현실앞에서 남.북 화합이나 민족의 자주평화통일이 가능한지 고인에게 돼물어본들 이제와 무슨 변명을 하랴만, 이는 눈가리고 아홍하는 식에 그저 국민들을 설레이고 들뜨게 만들어 놓은 것과는 달리 실제적 통일은 사실상 현실이 아닌 가식적 성과만을 취해 요식행위로서 미국 제국주의 놀음에 놀아나는 망국적 시나리오였음이 들어남인데, 위정자의 화려한 팡빠레 소리에 국민들은 만족할 수 밖에 그저 구경만 하고 만 격이라서 값비싼 연출작으로 남아 이를 재평가 함이 마땅하다 여깁니다.

해서 김대중 전대통령 서거를 맞아 이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사람들 모두가 고인에 대하여 지나친 우상심은 결코 그 정치사를 제대로 알고 뒤돌아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보다 냉정함과 이성적인 판단이 절실함에 아래의 글(대일노무법인)을 소개 하오니 여러분들도 나름대로 다시한번 새롭게 진단 해 보시기 바랍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3월 21일 대구 영남대에 특강을 하고 있는 장면. © 편집부


70년대 김대중의 활동-1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 1969년 3선 개헌 저지 투쟁이 실패하고,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持病으로 병상에 눕게 되자 신민당은 다시 출발점에 서야했다. 1970년 1월 26일 당총재와 대통령 후보를 동시에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유진오 총재의 퇴장으로 유진산(柳珍山) 시대가 열릴 것 같았다. 유진산은 수석 부총재인데다 당내 제 1파벌의 보스였으며 정치력에서 단연 1인자였다. 그러나 그는 권모술수에 능한 이미지 때문에(유진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대부분이 반대파의 모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야당의 여러 파벌들은 총재 경선이나 대통령 후보 경선 때뿐 아니라 평소에도 서로가 반대파 인물에 대한 중상모략을 많이 했다. 집권 세력도 공작정치를 해왔지만 야당 내 여러 파벌들의 실력을 따르지는 못했다. 보수야당에서 공산당식 모략을 잘하는 자가 많은 것이 뜻밖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엄연한 사실이다. 야당생활을 오래 한 정객들은 누가 이러한 모략의 일인자인지 안다) 대통령 후보가 되기에는 문제가 있었고 박정희 씨를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다시 말해서 박 정권이 야당 후보가 되었으면 하는 인물이었다.

1969년 11월 8일 김영삼 원내총무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여 세대교체 여론을 조성했다.

“우리 야당은 빈사상태를 헤매는 민주주의를 회생시키는 데 새로운 결의와 각오를 다져 앞장서야 할 사명 앞에 서 있다. 이 중대하고 심각한 사명의 대열에서 깊은 의무감과 결단 그리고 벅찬 희생을 각오하면서 71년 선거에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결의를 당원과 국민 앞에 밝힌다.”

이 성명발표는 수원의 빈센트 병원에 입원 중이던 유진오 총재에게만 사전 통고된 전격적인 선언이었다. 김영삼 원내총무는 신민당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잘 이끌어 차세대 지도자로 부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은 미약했고 노장층은 한결같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 원내총무에게 강한 역풍이 몰아쳤다. 유진산 당수는 ‘口尙乳臭’란 표현을 쓰며 반박했다. 유진산은 자파 당원들에게 김영삼의 지명운동에 동조하지 말도록 단속했으며 이재형, 정일형 등 다른 파벌의 노장층 모두가 이 문제에서는 연합전선을 폈다. 김영삼 의원을 후원하는 사람은 노장층에서는 서범석 의원 정도였고 소장층에서도 조윤형(작고) 등 몇몇 의원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세찬 노장층의 공격에 휘말린 김영삼은 김대중의 협조를 구했다. 조윤형 의원이 김대중을 찾아가 만났다. 조윤형은 “우리 야당의 활로를 트기 위해서는 침체의 요인인 보수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김대중씨도 김영삼씨와 함께 후보 경쟁선언을 해서 40대 후보를 쟁취하는 공동전선을 펴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아직은 당내의 형편이 40대 기수론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되지 않았고 나의 목표는 75년 대통령 선거라면서 지명전 경쟁선언을 거부했다. 조윤형은 71년 대통령 선거에 나설 계획이 없더라도 40대의 도전은 개인의 이해타산을 떠나 젊은 우리들이 함께 쟁취해야 할 高地라고 역설하고 어떤 형태로든지 협조해 줄 것을 권유했으나 김대중은 시간을 두고 연구하자는 말로 거절했다. 김영삼의 40대 기수론은 초기에는 당내에서 외면을 당한 고독한 투쟁이었다.

당내 기류를 예의 주시하던 김대중은 시간이 지날수록 40대 기수론이 호응을 얻자 태도를 돌변, 전당대회 이틀 전인 1970년 1월 24일 뉴 서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1970년 1월 26일 전당대회에서는 당총재와 대선 후보를 동시 지명하기로 되어 있었다. 전당대회 직전에 신민당은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후보는 6월중 선출하고 총재 경선만 실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 70년 대통령 선거유세에서의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


총재 경선에는 노장층인 유진산 이재형 정일형이 나섰다. 이재형은 윤보선의 지지를 받았고 정일형(현 국민회의 부총재인 정대철의 부친으로 김대중의 정치 초년 시절에는 후견인 역할을 함)은 김대중의 지원을 받았다. 윤보선은 비주류의 反유진산연합 형성에 앞장섰다. 이에 대항해 유진산은 재야 세력 포섭에 나섰다. 전당대회 수일전 이재학의 구자유당계가 신민당에 흡수 합당되고 이철승 등 민주계 22명, 윤길중 등 혁신계 10명이 입당했다.

비주류는 연합전선을 형성, 1차 투표에서는 이재형과 정일형 두 의원이 경쟁하고 2차 투표 때 표가 적은 쪽이 경쟁에서 물러나 상위 득표자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다.

1월 26일의 총재 경선 결과는 유진산 286, 이재형 192, 정일형 125, 무효 3표였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당헌에 따라서 2차 투표를 하게 되었다. 정일형은 신상발언을 통해 당수경쟁에서 물러나기로 선언하고 이재형을 도왔다. 그러나 2차 투표결과는 유진산 327, 이재형 276, 무효 3표로 정일형 지지표 3분의 1이 유진산 쪽으로 이탈해 反유진산 연합부대는 패배했다. 막후 협상력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유진산이 야당 총재가 된 것이다.

전당대회를 치른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70년 2월 12일 이철승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기로 선언했다. 이로서 이들 40대 3명은 젊은 힘을 과시하며 대통령 후보를 꿈꾸던 유진산 총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예정된 1970년 6월에서 다시 연기해 9월 29일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40대 기수론이 당 내외에서 호응을 얻자 유진산 총재는 70년 3월 10일 기자회견에서 절대로 대통령 후보에 나서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후에도 유진산은 기자회견이나 당 공식기구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불출마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유진산은 8월 27일 지도 위원회에서 “후보에 나서지 않겠다고 공언했다고 해서 후보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치는 유동적이므로 당에서 십자가를 메라고 하면 당명에 따르겠다”는 말을 했다.

40대 기수 3명은 김영삼의 제의로 7월 23일 인천 올림포스 호텔에서 만나 선의의 경쟁을 다짐하는 각서를 교환했다. 그 내용은 우선 자율적인 후보 단일화에 노력하고, 단일화가 안되면 지명대회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며, 1차 투표에서 과반수에 미달할 때에는 셋 중의 1위에게 표를 몰아준다는 것이었다.

한편 신민당 내에서는 유진산이 지명한「대통령후보조정 12인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노장 후보의 물색에 나섰다. 이들은 63년과 67년의 대선 때처럼 이범석?백낙준?허정?이인 등 정계원로들과 접촉했으나 표 대결이라는 점에서 거부당했다. 결국 노장 후보 옹립은 실패했다.

8월 3일 유진산은 월남?대만?일본 3개국을 야당 총재 자격으로 순방했다. 유진산은 각국 행정수반과 회담했고 현지 한국대사관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것은 박정권이 유진산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계산 하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8월 29일 청와대에서 박정희-유진산 여야 領袖 회담이 있었다. 박정희-박순천 회담이후 5년만의 여야 영수 회담이었다. 배석자 없이 3시간이나 끈 회담내용에 대한 확실한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영수회담이 있은 3일 후인 9월 1일 정무회의에서 유총재는 “몇 개월 전의 불출마 선언을 상황이 달라진 지금에 와서도 계속 지켜야 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면서도 “그렇다고 지명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된다 해도 수락할 것인지에 관한 결심은 아직 서 있지 않다”고 말해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진산 직계인 이민우(1985년 신민당 총재가 되어 2?12 총선을 이끌었음), 김의택 등은 출마할 뜻이 있다하고 생각하고 후보추대위원회를 구성, 조직 점검에 나섰다.

영수회담을 전후한 유진산의 움직임은 바로 회담의 목적이나 내용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 즉 안보 문제와 국내정치문제 등을 종합하면 與野 영수회담의 필요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3선 개헌안이 1969년 가을 국회에서 변칙 통과되어 3번째 출마가 가능해진 박정희 씨는 다음해인 1971년 선거에서 당선돼야 했고, 신민당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위한 9월 임시전당대회를 꼭 한 달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으므로 영수회담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초미의 관심사인 야당 대통령 후보로 누가 선출될 것인가에 대해 논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수회담을 전후해서 유진산이 출마 가능성을 언급한대서도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로서는 유진산 총재를 비롯한 40대 세 기수 중 누구를 경쟁상대로 하느냐에 따라 71년 대통령 선거의 판도가 정해지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가장 상대하기 쉬운 상대가 지명되기를 바라고 또 막후 공작을 통해 이를 관철하려 했다.

9월 19일 대통령 선거 기본 전략 마련을 위해 공화당과 내각의 당정연석회의(黨政連蓆會議)가 열렸다. 박정희 씨는 ‘전국적으로 골고루 이기는 선거’를 치르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기본 전략이 마련되었다.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선출되기 10일 전의 일이었다.

상대방의 후보가 결정되어야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데 이처럼 미리 기본 전략을 작성한 것은 상대후보를 예상하고 있었던 셈이다. 더욱이 ‘골고루 전국에서 이기는 선거’라면 충청도 출신의 유진산 총재를 후보로 생각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진산이 완전 사퇴함에 따라 박 정권의 선거 전략은 빗나갔다. 그 다음에 선호한 후보는 누구였는가?

“당시 권력층에서는 오히려 김대중씨보다 김영삼씨가 더 어려운 상대라고 판단한 것 같아요. 김영삼씨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는 당 지도층 이재형씨 집에는 지명대회를 앞두고 중앙정보부장(김계원)이 몇 차례 방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민당의 대통령후보 지명에는 고위권력층이 개입했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김영삼을 지지했던 조윤형 의원이 나중에 한 증언이다. 김계원씨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에 중앙정보부의 공작이 있었음을 나중에 인정했다.

또 유진산 총재와 동남아 여행을 했던 김수한 의원(김영삼 정권에서 국회의장 역임)은 “당시 권력층에서는 공화당 후보 박정희와 같은 영남 출신의 김영삼이 야당 후보로 나서는 것을 불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했다.

박정희 씨와 지역 기반이 겹치는 김영삼을 박 정권이 기피했을 가능성은 크지만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박정희 씨가 김영삼과 김대중 가운데에 누구를 상대로 하고 싶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지명대회 직전까지 40대 기수의 경쟁은 치열했다.

유진산은 9월 25일 오전 이철승, 김영삼, 김대중을 자택으로 불러 “내가 출마하지 않을 테니 그 대신 나에게 후보 지명권을 일임해 달라”고 제의했다. 유진산으로부터 별도로 후보 지명 언질을 받은 바 있는 이철승과 김영삼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지자들과 상의할 시간을 달라고 한 김대중은 오후 1시 30분에 ‘6인 지명단’에 추천권을 위임하겠다는 대안을 냄으로써 사실상 이 제안을 거부했다.

9월 27일 김영삼과 이철승은 그랜드 호텔에서 유진산 총재가 내민 메모지 서약서에 서명했다.

서약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합에 있어 나는 후보 제1 추천권을 유당수에게 맡기고 당수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을 추천했을 경우에는 나를 지지하는 대의원들과 함께 일체의 난동이나 반란을 하지 않고 당수의 추천에 승복하여 지명대회와 대통령 선거에서 성의를 다할 것을 인격과 신뢰를 걸고 당과 국민에게 서약합니다.


유진산 당수가 누구를 지명할 것인가에 대한 추측과 소문이 난무했다. 유진산은 김영삼과도 이철승과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유진산은 본명이 유영필(柳永弼)로 전라북도 금산(錦山) 출신이었다(행정구획 조정으로 나중에 충청남도가 됨). 자신이 살던 진산면(珍山面)의 지명을 따서 개명을 했고 자신이 살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옥계(玉溪)라는 호를 사용했다. 이철승의 부친은 유진산의 부친과 여수 돌산에서 동업으로 금광업을 했었다. 유진산은 이철승의 숙부 이석주씨와도 절친한 사이로 한국전쟁 때는 이석주씨 집에 피신을 했으며 이철승의 정치 스승이 되기로 약속한 관계이기도 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진산이 이철승을 후보로 추천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신민당 내 사정에 정확한 사람들은 이 소문을 믿지 않았다. 이철승은 1954년 3대 국회에 진출했었다. 민국당을 중심으로 야권의 여러 정파가 1955년 9월 19일 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었다. 이때 이철승은 장면 중심의 신참 무소속 그룹인 신파의 일원이었다. 민주당 내부에서 구파와 신파의 갈등은 치열했다. 신익희씨나 조병옥씨가 없었으면 일찌감치 분당할 당이었다. 이철승은 구파의 조직참모인 진산에게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했었다.

이에 비해 같은 민주당 구파출신으로 20년 이상 같은 배를 탄 김영삼 원내총무는 진산에게 무난한 선택이었다. 유진산은 9월 28일 오후 4시 중앙상무위원회에서「나는 당수로서 김영삼 의원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여러분 앞에 추천한다」고 공개 발표했다.

이로서 모든 것은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유진산은 당 내 5분의 2를 자파 대의원으로 거느리고 있었으며 서약에 따라 이철승도 김영삼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비주류측에서도 속속 김영삼 지지를 약속하며 당직배분 문제를 제의해오고 있었다. 전당대회는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것 같았다. 언론매체도 김영삼의 승리를 확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대중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날 김대중의 심복인 김상현이 일선에서 발벗고 뛰었다. 김대중 진영은 퇴계로 금수장 호텔에 진을 쳤다. 대의원 9백표 중에서 계산해 본 결과 김대중을 지지할 표는 242표에 지나지 않았다.

참모들은 이철승의 본부를 찾아가 전라도라는 지연을 근거로 김대중 지지를 부탁했다. 그러나 이철승은『정치와 고향선배를 몰라보는 김대중을 지원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김대중은 이날 밤 청진동 일대 여관에 나뉘어 여장을 풀고 있던 대의원들에게 이희호, 김상현 등을 대동하고 찾아가 일일이 큰절을 한 후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은 표의 이탈을 막기 위해 각 계보별로 집단투숙을 하면서 다른 계보요원의 침투를 막으려고 파수군까지 세워 두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서슴없이 적진에 뛰어들어 큰 절을 올리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에 앞서 김대중은 지난 8개월 동안 전국의 지구당을 누비며 대의원들을 설득했다. 이러한 강행군으로 조직의 밑바닥을 다졌다. 민주당 신파에 속했던 김대중은 민주당 구파가 주도권을 잡은 신민당에서 비주류에 속했다. 신파 원로인 정일형과 박순천의 지지를 받았으나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은 김영삼과는 반대로「저인망 어선」「베트콩 작전」이라고 불릴 만큼 하부조직을 파고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9월 28일 밤 김대중은 동아방송의 김 모 기자를 만나 두 가지를 부탁했다. 그는 야당가의 움직임을 한 눈에 꿰뚫고 있었다(이 나라에는 ‘정치군인’도 있고 ‘정치기자’도 있다. 숫자로 따지면 후자가 전자보다는 몇 배 많을 것이다. 그뿐인가. 정치목사, 정치신부, 정치승려, 정치학생, 정치앵커, 정치검사, 정치교수, 정치교사, 정치시민단체 등 ‘정치’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존재가 매우 많다. 정치군인만 비난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 ).

『김형, 난생 처음의 부탁이오. 지금 고흥문 사무총장이 엄청난 돈을 풀고 있다는 정보가 있는데 이 시간부터 돈을 쓰지 말길 바란다는 내 말을 전해주시오.』

김대중과 고흥문은 국회 재정경제위 소속이었다.

『다른 하나는 김의택 전당대회의장에게 내일 아침 당헌개정안이 상정되면 우리 쪽 개정안에 손을 들어 달라고 전해 주시오. 떨어지더라도 정치생명은 유지해야 하니 이 두 가지 부탁을 제발 들어주시오.』

김대중은 9월 29일 아침 대회장인 시민회관 입구에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동원, 멜빵을 메고 함성을 지르도록 했다. 지지자들은 김대중의 대형 사진을 붙인 피켓을 들고 입장하는 대의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피켓에는「金大中 同志를 大統領 候補로!」「勝利의 旗手 金大中 同志 萬歲!」라고 써 있었다.

투표 전 이철승은 신상발언을 통해 김영삼을 밀겠다는 서약이행을 선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상발언이 봉쇄되었다(이것을 정치공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격분한 이철승계 대의원들은 모두 백지투표를 하였다.

대의원 투표결과는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4표(이중 78표가 백지 투표, 이철승 계보의 투표였다)였다. 과반수인 443표에서 김영삼은 22표가 모자랐다. 계산대로라면 대의원의 40%를 차지하는 유진산계, 두 번째로 큰 계보인 이재형계의 약속, 그리고 서약대로라면 이철승마저 김영삼을 지원하게 되어 있으므로 대의원 3분의 2의 지지를 받게 되는 김영삼의 승리는 확정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진산직계표와 이재영 계보표가 상당수 이탈한데다 이철승 계보가 백지투표를 한 것이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자 40분간의 휴회가 선포되었다.

무효표를 주도한 이철승계 참모 조연하는 자파 대의원들을 한 데 모아놓고 “우리가 끝까지 캐스팅 보트를 쥐기 위해서는 굳게 결속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과반수에서 61표가 모자랐으므로 이철승 계의 백지투표 78표만 얻으면 2차 투표에서 역전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이철승의 참모 조연하와 직접 협상했다.

“조 선배님, 저는 선배님과 고향도 같으려니와 선배님의 도움으로 신민당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김영삼은 경상도입니다. 저를 밀어주십시오.”

“이 조직표는 素石(이철승의 호)이 다져놓은 기반입니다. 소석의 앞날을 위해 무엇을 약속하겠소?”

“선배님, 무엇이든지 요구하시는 대로 각서를 쓰겠습니다.“

“정치인에 있어 위상이란 자신의 지위로 말하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대통령후보 지명을 받게된 사람은 경륜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야당의 제일인자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 후보라 해서 어떻게…”

“거두절미하고 소석을 위해 어떻게 하겠소?”

“앞으로 전당대회의 총재 경합은 물론 다음 대권 경쟁이 있을 시 그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겠습니다.” (김대중은 명함에 이같은 내용을 써서 서명을 해 조연하에게 건넸다)

조연하는 이 각서를 받고 자파 대의원들의 동의를 얻어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을 밀기로 결정했다. 이철승은 2차 투표에 참석하지 않고 혼자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이철승계의 대의원은 전라도 출신이 대부분인 관계로 김대중에게 표를 던지는데 이탈하지 않았다. 78표 중 76표가 김대중에게 갔다.

이어 김대중은 신민당의 제 2계보의 수장 이재형과도 밀약을 맺었다. 다음 번 총재 경쟁에서 이재형을 밀기로 약속한 것이다. 김영삼 측에서는 당황했다. 약속대로라면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김영삼 측에서는 계보 보스들에게 약속 이행을 촉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이재형은 계보 대의원들에게『1차 투표 때처럼 그냥 방치하라』고 지시했다(이재형은 1970년 11월에 총재 경선에 나섰으나 김대중이 유진산을 지지하여 패했다. 1971년 초 신민당과 김대중을 극렬 비난하면서 탈당한다. 1980년에는 민정당 창당 발기 위원장이 되었고 당 대표를 역임했다).

2차 투표가 진행 중일 때 불길한 예감이 든 조윤형은 김영삼을 로비로 불러내어『형님, 2차에서는 아무래도 역전될 것 같아요.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속은 것은 분하지만 우리가 어리석었던 것으로 해둡시다. 형님만이라도 약속은 지켜야지요.』라고 말해 패배를 내다보고 있었다. 2차 투표결과는 김대중 458표, 김영삼은 1차 때보다 줄어든 410표, 기타 18표로 김대중이 과반수에서 12표를 넘어 이겼다.

김대중의 승리가 선포되자 대회장은 환호성과 탄식하는 소리에 휩싸였다. 유진산은 옆에 있던 조직 참모 이민우(1985년 신한민주당의 총재가 됨)에게 말했다.

『우리 놀래미회 먹는 셈치고 김대중을 밀어줍시다.』

김대중이 연단에 올라 후보수락 연설을 했다.

『…지명대회에서 투표를 한다 할 것 같으면 커다란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고 걱정하던 당 내외의 모든 걱정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당수의 추천에 대해 승복하지 않고 끝까지 표결을 주장한 것은 결코 당을 아끼지 않거나 당수를 존경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소신을 관철하는 자식이 장래 발전성이 있듯이, 우리가 선배 당수의 말씀을 충분히 존중하고 존경하지만, 그것이 자기의 신념이라고 생각할 때는 당헌과 당규에 위배되지 않는 한, 한번 자기의 소신을 관철하는 그러한 정도의 신념이 없어 가지고는 어떻게 해서 명년에 박정희 정권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겠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갈채와 함성이 장내를 진동하며 김대중을 축하했다. 이어 김영삼의 연설이 있었다. 전날 그토록 애써 작성한 후보수락연설문을 구겨 버리고 즉석 연설을 했다.

『…김대중씨의 승리는 신민당의 승리이며 나의 승리입니다. 김대중씨의 당선을 위해 제주도에서 거제도로, 거제도에서 무주구천동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겠습니다.』

김영삼은 그날 밤 선거참모본부에 돌아와 통곡하는 참모들을 달랜 후 상도동 자택으로 돌아와 눈물을 흘렸지만 다음 해 대통령 선거전에서 제주도에서 무주구천동까지 지원유세를 해 자신의 말을 지켰다.

이날 밤 김대중은 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조연하와 자리를 같이 했다. 김대중은 ‘조 선배의 은공을 자손 대대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감사했다.

이 예상외의 결과를 미리부터 장담한 사람이 있었다. 신민당 내에서 ‘정보부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정부?여당 내부의 정보에 밝았던 박병배 의원이었다.

박병배는 후보지명 전날 밤, 김영삼과 김대중 계열이 마지막 표 점검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시간에 김대중의 당선을 호언장담하며 출입기자들과 내기를 하자고까지 말했다. 지명대회 당일 모 석간신문이 1면 톱으로「김영삼 대통령후보 지명」이란 오보를 내는 마당에 그가 정확하게 김대중의 후보지명을 예측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삼의 예상치 못했던 패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재형계와 이철승계가 김대중에게 매수되었을 뿐 아니라 유진산 계보도 상당수 이탈했다. 유진산 계보의 중진들은 사보타지라고 할 만큼 김영삼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유진산의 1급 참모이면서도 40대 기수론을 적극 지지했던 중진 의원 고흥문 사무총장은 80년대에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柳당수의 김영삼씨 추천이 발표된 후 견지동 사무실(유진산 계보 사무실)에 들렀더니 모두 픽픽 웃더군. 일단 경쟁에 들어섰으니 이기도록 힘을 써야될 것이 아니오. 당시 김영삼씨 개인으로는 조직과 자금도 아주 미비했지 막바지 득표운동을 일원화하기 위해 김영삼씨한테 사람과 자금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김동영씨 한사람만 터덜터덜 왔어요. 자금도 없어서 柳당수와 내가 5백 만원씩 갹출했지. 그런데 그 돈마저 전당대회 전에 다 쓰지를 못했다니까』

여기에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운 일로 김영삼은 대회 전날(28일)을 허송세월했다. 김영삼 의원은 후보 수락연설문 내용을 협의하러 유진산 당수의 자택을 방문했었다. 면담을 끝내고 지방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을 순방하기 위해 승용차로 시내로 들어오다가 한강 인도교가 차단되어 황금 같은 2시간을 길에서 허비했다. 마침 방한 중이던 하일레 셀라시에 이디오피아 국왕의 행렬이 통과한다는 이유였다(이 일을 우연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재형도 28일 낮 김영삼을 불러 대의원과 접촉할 시간을 뺐었다.

표 대결에서 승산이 적은 줄 알면서도 김대중과 참모들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시간 그들은 시내 대의원들의 숙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한 표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김영삼이 대의원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잠자리에 든 대의원이 많았다.

김대중은 이 지명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명 제 1차 투표에서 나는 김영삼 씨보다 적은 표를 얻었다. 그러나 나와 김영삼 씨는 모두 총 투표수의 과반수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재투표를 하게 되었다. 쌍방이 서로 과반수를 얻지 못한 것은 이철승 씨의 세력이 백지 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제2차 투표에 들어갔을 때 신문기자들에게 나의 승리를 예언했다. 왜냐 하면 제2차 투표에서 이철승 계의 표가 나에게 돌아오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제2차 투표에서 나는 과반수를 훨씬 넘어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나는 지명 수락 연설에서 “바로 지금부터 진정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 나의 당에도, 한국의 정치에도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나는 이같은 새로운 시대의 선두에 서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워서 반드시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방지하는 동시에 국민이 건국 이래 염원해 오던 민주적인 정권교체를 실현시키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이 지명투표에서 나는 또 새로운 시도를 해 보면서 성공적으로 게임을 이끌었다.

나는 투표일에 애드벌룬을 하늘 높이 올리는 한편 멜빵을 어깨에 걸친 나의 많은 지지자를 투표장소인 시민회관(市民會館 ; 지금의 세종 문화회관) 부근에 동원, 회관을 둘러싸고 있도록 했다. 그리고 대회장 일대에 나의 포스터를 붙이는 등 김대중 무드를 일으키게 했다. 나는 한국의 당 대회에서는 지금까지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의원들에게 강한 인상과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런 방법은 선진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신선한 발상으로서 주목되어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後廣金大中大全集』제 6권 독재와 나의 투쟁, 1993 P103~104)


김대중은 “앞으로 전당대회의 총재 경합은 물론 다음 대권 경쟁이 있을 시 이철승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겠다”고 서약하고 이철승과 이재형을 매수한 사실을 자서전에서 결코 말하지 않는다.

김대중의 승리가 당시 집권층의 의도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단언하기 어렵다. 집권층의 공작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하는 견해도 있다. 다음은 이러한 주장 중 대표적인 것이다.

1970년 9월 26일 당시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경쟁에는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李哲承) 등 3인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당 대표인 유진산(柳珍山) 당수는 김영삼을 당 공식후보로 지명함으로써 김영삼은 전당대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그의 지명이 확실시됐다. 김영삼은 승리를 확신하고 지명수락연설문 작성에만 신경을 썼다. (중략)

박정희로서는 상대 당의 같은 경상도 출신인 김영삼의 대통령 출마를 꺼렸다. 그래서 공화당은 같은 경상도 출신의 김영삼을 저지해야 되겠다는 계산하에 그의 경쟁자인 김대중(金大中) 후보를 지원했다. (중략)

이에 앞서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 싸움에 자기보다 연하인 젊은 김영삼이나 김대중과 싸우게 되는 것이 쑥쓰러웠다. 그래서 공화당 4인 체제를 불러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는 유진산(柳珍山)을 내세우도록 공작하라고 분부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 의하여 當者인 유진산에게 전달이 되어 유진산도 나서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선거자금을 걱정하여 그들에게 선거자금의 조달을 의뢰했다. 공화당 4인 체제는 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자금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김영삼이 선수를 치고 나오고, 그의 결심과 대항이 만만치 않자 유진산은 그를 내세우고자 하는 공화당에 대하여 선거자금의 불충분을 핑계로 부득이 그의 출마를 포기하고 젊은 사람들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유진산 당수는 당 공식후보를 지명할 때 김영삼과 이철승을 불러 서약을 받았다.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지명하든 지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명에 승복하고 지명된 자를 지원해 준다는 것이었다.

한편 김대중은 어떻게 되어서 지명경쟁에 뛰어들었는가? 김대중은 김영삼과 이철승에 비해서 모든 것이 뒤떨어진 사람이었다. 의회경력이나 당 서열상에서도 그렇거니와 두 사람에 비해서 당내 지지세력도 빈약했다. 그러나 그는 근 10년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을 하던 김형욱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김형욱(金炯旭)은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북의 서북세력을 대표하고 있었다. 특히나 경상도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지난 삼선개헌의 공화당 영빈관 철야 의원총회에서 경상도 세력인 4인 체제에 의하여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서 쫓겨난 데 대해 몹시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4인 체제와 통하는 신민당 진산계와 김영삼을 누르기 위해서 그의 소유인 서울 무교동 소재 삼흥빌딩에 사무실까지 빌려주고 있던 김대중에게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가도록 권유하고, 경상도 세력에 눌려있는 전라도와 이북의 서북세력의 기수 노릇을 하도록 측면에서 공작하여 김대중의 입후보 지명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한두 저,『유신 공화국의 몰락』, 매산 출판사, 1986 P36~38)

이한두 씨의 주장은 전체적으로 신중히 검증되어야 할 내용이다.

이 내용 중 사실로 확인된 것도 있기는 하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3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과 김대중은 사이가 좋았다.

3선 개헌에 앞장서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김형욱은 3선 개헌 국회통과 후 해임되었다. 이후 박 정권에 대한 복수심으로 김대중을 비밀리에 지원해주기도 했다. 김대중으로 볼 때 김형욱은 박정권 10년의 비밀을 알 수 있는 大魚였다. 8대 국회를 무대로 김대중과 김형욱의 연계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다(김형욱은 8대 국회에서 공화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형욱은 김대중의 선거 자금 모금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사업가들을 설득하여 자금을 모으고 스스로도 상당한 액수를 보태, 김상현을 통해 김대중에게 주었다.

김형욱은 김대중과 친근했던 반면 김영삼 원내총무와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김 총무가 중앙정보부의 횡포를 맹비난하자 초산 테러를 사주하기도 하였다.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서너 살 적은 YS를 ‘형님’이라 부르는 등 비굴한 모습을 보였다.

김형욱은 6년 3개월 동안 재직했던 중앙정보부장 시절에 긁어모은 재산 중 수천만 달러를 가지고 1973년 미국으로 도피성 이민을 갔다. 김형욱이 구술한 내용을 김경재(현 국민회의 의원, 필명 박사월, 김경재는 71년 대선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김대중 당선을 위한 운동을 활발히 벌였다)가 정리,『김형욱 회고록』으로 출판했다. 박정권을 철저히 비방한 이 회고록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내용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었다.

당시 공화당 선거대책본부에 있던 한 간부는 여당이 선호한 야당 대통령 후보에 관해 뒷날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무리한 3선 개헌 때문에 선거전이 어렵다는 분석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통령의 영남 기반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영남기반인 김영삼씨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불리하다고 보고 있었다.”

보안사령관을 역임했던 강창성(현 한나라당 의원) 씨는 나중에 비화하나를 털어놓았다. 박정희는 3선 개헌 후 강창성 장군을 동남아로 보냈다. 그의 임무는 동남아의 유명 점성가들을 만나 박정희,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5인의 운명을 점치는 일이었다. 이들 중 누가 집권자가 될 운명인지 알아보는 일이었다. 결과는 박정희 김영삼 2인으로 나왔다. 강창성 장군은 귀국해서 점괘를 보고했다(전두환의 집권을 반대한 강창성은 1980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참고로 말하면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두환 측은 야당이 김영삼으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상정하고 있었으며, 그 다음은 김대중으로 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을 꺼렸다. 물론 가장 선호한 것은 김영삼, 김대중의 동시 출마였다.

김대중은 이철승의 도움으로 신민당 대통령 경선에서 김영삼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철승에 대한 약속은 끝내 이행하지 않았다.

이철승은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1980년 서울의 봄 때 1970년 9월 29일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김대중이 자신에게 각서를 써서 약속한 사항을 이행하라고 조연하에게 다그쳤다. 조연하는 김대중에게 이철승과 만날 것을 제의했다. 김대중은 “만나기는 만나야지요. 그런데 좀 기다려주시오”라고 대답했다. 김대중은 다시 찾아가 이철승과 만나라고 촉구하는 조연하에게 일시와 장소를 약속했으나 다시 바쁘다는 이유로 이를 취소하고 말았다.

이철승은 “춘산(조연하의 호), 당신도 대중이하고 똑같은 놈이 아니오. 그 놈과 짜고 물을 먹이자는 속셈인 줄 모르지 않아요”라고 조연하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이철승도 마냥 떳떳하지는 않다. 유진산이 후보를 지명하면 인격을 걸고 지지하겠다는 서약을 깨고 김대중과 밀약을 맺어 김대중 지지로 태도를 바꾸었으니....[중략]

정권 야욕과 지역주의를 이용한 김대중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김대중 자신도 역시 패권도전을 놓고 정권야욕에 눈이 멀어 지역주의를 이용한 정치인 중 한사람이었음인데, 이승만,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패권에 필요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양심과 도덕을 저버린 패걸이 정치꾼에 불과했다고 봅니다.

그 정치자금도 상당한 의혹을 안고 있었음은 부정한 돈에 의한 뒷거래 즉 밀실자금(김형욱.전두환.노태우)을 받아 사용한 전적 등은 이중성을 들어낸 도덕적 이율배반이다. 이는 그의 정치철학이나 이상적 신념을 깨트린 두얼굴의 양심이기도 합니다.

조상도 팔아먹는다는 풍얼이 있듯이 그 말과 소신이 행동에서 이중성으로 얼룩진다면 과연 그를 위대한 지도자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져 볼때 과연 정직함이 의심되고 위선자에 변명어린 화술에 민중은 기만당함이니 위대한 지도자 혹은 민족주의자 처럼 과잉홍보에 전국민을 기만한다면 다시한번 냉철하게 인물사에 대하여 재평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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