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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맛에애국-매국 李完用처럼 환장한··소신도 없이 오로지 대통령병에 걸리고 장관 좀 해 먹었다고 그 맛에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10.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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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국노 이완용과 그의 일가족
[네티즌 칼럼] 매국노 이완용은 1858년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사망은 1926년, 약 69세까지 살았다는 것을 보니 당시로선 꽤 장수했다. 그는 어려서 집이 가난해서 아들 없는 흥선대원군과 절친했던 집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정식명 을사늑약) 체결 공로로 의정대신 서리 겸 외부대신 서리
1920년 한일합방(정식명 경술국치) 공로로 백작
1921년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글 재주가 뛰어나 일찍 관직에 나갔고 한일 합방뒤에도 고종의 충신으로 여겼다. 그가 쓴 서예는 한 때(일제때) 조선 4대 서예가로 불릴 정도로 (무척이나 과찬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만만한 실력이 아니였다.

그에게 보이는 특이한 사실은 그가 개화파 중에서도 현실에 입각한 개혁파였다. 1890년 주미 대리 공사로 미국에 있다 귀국한후 성균관을 개편해 지리, 산술, 과학을 신설해서 교육하는데 앞장 섰고 기본적인 의무교육까지 완비해서 이것이 오늘날의 초등학교 의무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서재필의 독립협회 독립신문의 가장 큰 손이였다. 서대문구의 독립문의 글씨도 이완용이 썼다고 한다.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서재필이 미국으로 쫒겨간 후에도 그는 독립 협회를 이끌었다.

▲ 을사늑약을 체결한 매국역적들


3.1운동때 손병희로부터 민족의 대표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민족반역자, 매국노라 욕하는데 지금 독립운동에 참가한다고 애국자라 하겠는가"

이완용의 충직스런 성격은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양아버지가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음에도 매일 10리를 걸어 문안을 했고 양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관직을 물리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이완용은 원래 친일파가 아니였다. 친미파였다가 미국은 조선에 결코 방패가 되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을미사변 때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주도하며 친러파가 됐다가 결국 친일파들에 의해 낙천되어 살다가 러일전쟁의 양상을 보고는 결국 친일파가 된 인물이다. 그리고 국권을 일본에 넘기는데 서명했고 그 공로로 당시 30억여원의 거액의 돈과 수 많은 토지를 보상받았다 .이후 3.1만세운동을 진압하고 그 공로로 작위가 승진됐다. 그리고 항일광복운동가들의 집요한 암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현재 그의 무덤은 처참히 파손되었으며, 친일매국노로 단죄되었다.

친일파들에 의해 관직이 파직당하고 바로 의병투쟁이나 만주지역으로 가서 항일투쟁을 했다면 길이 빛날 민족광복운동가로 역사에 이름을 기록했을터인데, 그 놈의 권력맛을 잊지 못하고 친일파들의 유혹에 넘어가 나라를 팔아 먹는데 앞장을 섰던 것이다.

정치적 소신도 없이 오로지 대통령병에 걸리고 장관 좀 해 먹었다고 권력맛을 못 잊어 사리분별 못하는 정치꾼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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