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코리아저널/송윤종기자]1897년 정월 발생한 전라도 고부(전라북도 정읍시)동학운동은 조선말 풍전등화와 같은 외세의 압력에 내환이라는 악제로 조정을 압박하는 사건이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과 착취로 황폐해 가는 농민을 자극하여 탐관오리의 응징을 동학교도와 농민이 주도한 근대적 항쟁으로 기록됐다.

▲ 당진시 승전목(좌)과 여미평 1897년 10월24일 동학농민군이 일본정규군을 무찌른 역사현장이다.
척왜양이(斥倭攘夷)의 기치아래 모인 전국의 동학군은 40만의 대군으로 전라도의 전봉준의 20여만 명과 호서지방 손병희가 이끄는 20여만 명이 부정과 부패의 사슬을 끊고자 봉기했다. 요원의 불길은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수원에 이르기 까지 파죽지세로 조정을 압박하기에 이른다. 결국 조정에서는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정규군과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 일본군은 제물포로 청나라의 원군은 아산만으로 들어온다.
내포지방의 동학군은 예포의 박희인과 면천의 이창의가 이끄는 15,000명이 여미평(서산시 운산면 여미리앞 평야)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미 태안군을 장악한 후라 충천한 사기로 열약한 무기 체계를 만회하고 있었다. 특히 지형지물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이른바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게 되는데 많은 전투로 터득한 전력 있었다.
승전목은 당진시 구룡리에서 사기소리에 이르는 중간지점의 매우 협소한 지형으로 구룡리에서 면천면으로 가는 길 좌측에 이배산과 검암천이 흐르고 있고 우측에 높은 산이 굽은 형태로 있어 들어가면 나오기가 쉽지 않은 지형이다. 189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면천을 출발한 일본정규군 이까마쯔소위가 이끄는 1개 소대와 2개 분대 관군 35명은 여미평 동학군을 해산하기위해 사기소리에서 구룡리방면으로 이동 중 깃발을 든 동학군 몇 명이 총을 쏘고 도망을가 쫓아가다 사전에 매복한 1만여 명의 동학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허를 찔린 일본정규군이 참패한 전투다.
10월24일 사기소리에서 구룡리 방면으로 이동하던 일본군은 협로를 통과하면 통로가 열릴 줄 알고 후퇴 없는 전진을 계속하다 협공을 당해 1시간 만에 퇴각 했는데 서풍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연기로 공격을 차단하는 화공을 병행하는 치밀한 작전을 구사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정규군을 무찌른 동학군의 유일한 승리였다. 이로써 갑오개혁의 서곡과 을사늑약의 단초를 제공한 의미도 있다. 동학군과 일본정규군의 전투중 괴산의 애제전투와 당진시의 승리목전투가 유일하게 승리한 전투로 남게 된다.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역사의 격랑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승전목전투는 충청도 향토사학자들의 고증과 증언으로 20여 년 전부터 발굴한 값진 역사의 현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충남, 대전 지회장 이영하 선생은 “늦었지만 관계당국은 동학농민운동 대첩일 을 양력 11월 24일로 지정하고 승전 기념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는 것이 매우 필요 하다고” 했다.
송윤종 기자 ehyun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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