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연 /홍익대 교수 시민의회전국포럼 상임대표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정치 뉴스에 과몰입하는 경향이 심해졌다. 
자다가도 일어나 뉴스를 검색할 정도였으니 소위 ‘내란증후군’의 피해가 적지 않다. 

물론 4.4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선고 이후 현재 6.3 대선을 앞두고 있긴 하지만, 경직된 마음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 
특히 '채 진압되지 않은' 이번 내란 사태를 통해 지금껏 내가 믿고 따르고 있던 ‘민주주의’란 말이 실상은 구체성이 없는 환상이었다는 인식이 크게 들면서, 숨 쉴 틈은 더 좁아졌다.

# 민주주의인가! 법주주의인가!

‘민주주의의 승리!’ 헌재 판결 이후 SNS와 언론 매체를 장식했던 말이다. 
나는 문득 위화감이 든다. 지난 겨울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어리석은 폭군을 ‘법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리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광장에서, 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애를 태워야만 했다. 

이토록 명백한 국가 폭력과 범죄에 대해 국민 스스로가 직접 판결하지 못하고 법관 9명(이번 경우엔 가까스로 8명)의 입만 바라보며 마음 졸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의아하다 못해 분노가 이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재판관이여, 부디 우리 뜻을 굽어-살펴-주시오! (나는 무의식적으로 종결어미를 ‘- 주옵소서!’라고 썼다가 기분이 상해 지워버렸다)’ 

우리의 기도에 법관은 추상같은 말을 내려준다 : ‘오냐, 내 너희를 굽어-살펴-주마.’ 21세기, 그것도 소위 민주주의 국가에서 등장하는 장면이라기엔 헛웃음이 날 정도로 가엽기 짝이 없다. 

정말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 우리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한다면서도 언제든 마지막에는 ‘법대’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소수 재판관 몇몇에 우리 삶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애초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법주주의(法主主義)’ 국가를 표명하는 나라였다면 이렇게까지 큰 반발심과 의구심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원상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민중의 지배’, ‘인민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demos, kratos). 

사전적 정의야 익히 알고 있어도,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내 입으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어쩐지 낯설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 즉 먼저 위에서도 언급한 ‘최종 법대 앞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굴욕감, 그리고 내가 민주주의를 말하기에 그것을 제도로써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는 결핍감이 뒤섞인 데서 비롯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국가 운영에 있어 국민주권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음에도 우리 법체계에서 이와 같은 국민주권의 제도적 실천을 나는 선거권 수준에서만 간신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목전에 두고 있는 이번 6.3 대선이 내가, 우리가 느끼는 이 타는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 줄 수 있을까? 
선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기계에서 나온 신(deus ex machina)’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다음 7가지 정책을 과감히 실행한다면 나는 비로소 민주공화정의 민주시민임을 ‘간신히’ 말할 수 있으리라. 

# 국민주권 실현을 위한 위한 7가지 제안 

1. 시민의 주도로 ‘개헌절차법’을 마련하여 제7공화국 시대를 열어 보자

현행 87년 헌법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시민사회를 비롯하여 정치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어떤 내용으로 개헌할 것인지의 논의 이전에, 앞으로 진행될 개헌은 소수 정치인으로 구성된 밀실이 아니라, 시민이 주도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광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거제 민주주의가 지니는 폐쇄성을 과감히 개방적으로 전환해, 어떤 방식으로 개헌할 것인가, 하는 그 원칙과 과정을 만드는 일에서부터 우리 광장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 

2. ‘국민투표법’을 전면 개정해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자

실상 우리 헌법에는 국민투표권이 보장되어 있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일부이다. 

우리 역사상 몇 차례 시행되기도 했지만, 독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였거나 지금은 그마저도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 

이름만 국민투표이지 현재 국민투표로 안건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대통령만이며, 국민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주어져 있지 않다. 

과거 4대강 사업, 후쿠시마농산물 수입 등 우리 사회의 중대 현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면 불필요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이 줄었을 것이다. 

물론 국민투표로 인한 결정이 우리 사회에 긍부정의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열려 있는 결말이다. 

그러나 국가적 현안에 대해 국민이 직접 의사를 표명하고 그에 따라 국가 운영의 장기적 비전을 만들어 간다는 그 원칙과 역량을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웃 대만은 7년 전에 제대로 된 국민투표법 개정을 통해 세계 속에서 민주주의 지수를 30위 중반에서 10위 안팎으로 올려 ‘아시아민주주의의 등대’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을 보건대, 국민투표의 그 효과는 이미 입증되었다. 

3. ‘시민의회법’을 제정하자

민주주의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추첨과 숙의라는 새로운 방법을 우리 법체계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일반 생활인으로서 모든 국민이 사회적 현안에 대해 생각할 수는 없기에, 5천만 인구집단을 대표하여 무작위로 추첨된 국민들이 ‘시민의회’를 구성, 이를 통해 사회적, 국가적, 시대적 의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특히 헌법, 선거법, 정당법 등 기존 정치인들의 이해관계에 밀착되어 해결이 쉽지 않지 문제들도 시민의회의 숙의와 공론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들을 마련하고 국회 또는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함으로써 의사결정의 직접성과 개방성을 확보할 수 있다. 

4. ‘주민의회’를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현하자

61년 5 · 16쿠데타로 사라졌던 지방자치가 91년 30년 만에 부활한 뒤로 약 35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현재 시군구의 지방자치는 규모가 너무 크기에 읍면동 수준으로 자치의 규모는 줄이되 주민들의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 
시민의회 방식으로 읍면동에서 주민의회를 설치 · 운영하고, 주민들이 직접 읍면동장을 선출한다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것이다.  

5. 실질적인 ‘주민 · 국민소환제’를 도입해야 한다

현행 지방자치법은 주민소환제를 명문화하고 있지만, 높은 문턱 탓에 거의 사문화되다시피 하였다. 

지난 2007년 실행되어 18년이 지나는 동안 숱한 주민소환운동이 펼쳐졌지만, 현재까지 단 1건의 주민소환만이 있었을 뿐이다. 

주민소환제의 현실적인 작동을 위해서는 주민소환법 개정을 통해 주민들의 진입 장벽을 낮춰야 한다. 

6. 정치참여를 막고 있는 현행 ‘선거법과 정당법’을 개정하자

정치 공학이라는 말이 난무할 뿐, 정작 정치다운 정치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이다. 
정치는 종합예술이다. 사회적 문제와 갈등이 정치를 통해 해소하지 못하면 사회적인 폭력과 폭동의 형태로 번지게 된다. 

현재의 선거법과 정당법은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통한 문제해결을 막고 있다. 

승자독식의 현행 선거법은 상대를 적대시하고 정치 혐오를 키우고 있으며, 현행 정당법은 지역정당 등 다양한 방식의 정당설립을 근본적으로 막고 있다. 

민심을 정치에 제대로 반영하고 시민의 자율적인 정치 참여가 보장될 수 있도록 선거법과 정당법을 우선 개정해야 한다.  

7. ‘국민주권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우리 사회의 인권 의식과 수준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상시적 주권 강화를 위해 ‘국민주권위원회’를 독립 기구로 설치하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국민주권을 침해하는 사건과 인물에 대한 수사와 처벌을 요청하고, 일상생활에서 국민들의 주권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과 제도를 제안하며,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와 정치를 학습할 수 있도록 국가와 지방정부가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사전적으로 정의되거나 문헌상 정리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현장의 ‘대화’ 속에서 상호 소통되었을 때 비로소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이라고 칭해질 수 있다. 

우리 민주주의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살아있고 깨어있는 제도라면, 이제 투표소 안에서 ‘조용히 또 비밀스럽게’ 기표하는 행위 정도로 우리에게 강요되는 그 침묵을 깨야만 한다.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혼잡함을 기본 형식으로 한다. 
광장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표명하는 그 혼돈 속의 질서야말로 살아있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 7가지 제안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를 세부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해 내는 과정을 통해 우리 민주주의에 생명의 숨결이 불어 넣어지기를 기대한다. 

※ 외부 필진 칼럼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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