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호 /대전대학교 교수

[시사코리아저널=이선우 기자] 어렸을 때 참 많이 입에 달고 다녔던 말이 있다. “아니면 말구!” 표준어로는 ‘아니면 말고’, ‘아님 말고’ 등으로 표현된다.

초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개구진 장난을 꾸미면서,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아니면 말구”라고 하며 안심시키곤 했다. 

중학교 때는 다른 동네 아이들과 힘겨루기를 할 때, 주저하는 친구들을 설득하며 “일단 한 번 해보자, 아니면 말구”라고 독려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내신 성적을 위해 과목별 요약 정리를 하면서 “시험에 안 나오면 어떡하지?”라고 묻는 친구들에게 “안 나오면 말구!”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취업을 준비하며 불안해하는 친구들에게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들을 때마다 “떨어지면 마는 거지, 뭐. 술이나 한잔하는 거지”라며 위로와 용기를 건넸다. 

지금도 연구 제안서를 작성할 때, 동료 교수들이 “채택이 안 되면 어떡하죠?”라고 묻는다면, “뭐, 아니면 마는 거죠. 내년에 또 제출하면 되죠. 하하하”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에게 ‘아니면 말구’는 어떤 의미일까? 

돌이켜보면, 이 말은 나 스스로에게 희망의 최면을 거는 말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주저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고,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도록 북돋워 주는 말이었다. 

“일단 해보자, 일단 도전해보고, 아니면 마는 거지, 뭐.” 사실 이 말은 지금도 많이 사용한다. 

학생들에게도 “일단 해봐라, 도전해 봐라, 가봐라. 그리고 아니면 마는 거지. 하지만 해본 것, 도전한 것, 가봤던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가는 쓰임새가 있다!”라고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니면 말구’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되어 사용되는 것을 보며 씁쓸함을 느낀다. 

원래 이 표현은 타인에게 확인되지 않은 유언비어나 거짓 정보가 판명되었을 때, 책임을 회피하는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무책임한 태도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방송에서도 ‘아니면 말고’ 식의 발언이 종종 등장한다. 

본인 자신에게나 친한 친구, 동료들 사이에서 사용하면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지만, 타인이나 경쟁 상대에게 무책임하게 사용하면 큰 상처를 주기 쉽다.

얼마 전 한 정치인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발언을 했다. 

이후 상대방이 언론을 통해 사실을 바로잡았지만, 그 정치인은 단순히 “잘못 들은 것 같다”라며 대충 마무리했다. 

이는 상대에게 큰 상처를 주고도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덮어버리는 무책임한 태도의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상대를 비방하거나 해코지하기 위해 근거 없는 유언비어나 소문을 퍼뜨리는 일이 많다. 

억울한 당사자는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상처를 입고, 나중에 진실이 밝혀진다 해도 그 상처는 오래 남는다. 반면,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린 사람들은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넘겨버린다.

언제부터 이 말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다시 긍정적인 의미로 돌아와야 한다. 

‘아니면 말구’는 무책임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고 도전을 독려하는 말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말이 우리 사회에서 희망의 언어로 통용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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