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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이의 열린소리] 10월의 민주주의, 부마민주항쟁
  • 시사코리아저널
  • 승인 2023.10.1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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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이 / 국립3·15민주묘지관리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항거가 있었다. 

그 중 국립3·15민주묘지가 위치하고 있는 경상남도 창원·마산 지역은 3·15의거, 4·19혁명, 부마 민주항쟁, 6·10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 곳이다.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은 1차 오일쇼크 등 경제위기와 맞물려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1979년 8월 YH무역회사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조치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시위를 벌였고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을 배후로 의심하였다. 

그 후에 일어난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등이 일어나며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학생과 시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결국,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앞에서 ‘유신철폐’라는 구호와 함께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학생들은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선언문 낭독을 하며 부산 시내 중심가까지 진출했고, 순식간에 5,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막으려는 경찰과 학생들이 충돌하며 수 백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고 부상을 입었다.

둘째 날이었던 17일에는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고, 다수의 시민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단순 학생시위로 시작됐던 부마민주항쟁은 점점 시민항쟁의 양상을 띄어갔다. 

셋째 날이었던 18일에는 이곳 마산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고 19일에는 마산산업전문대학, 주변 고등학교 삭생들까지 합세하여 8,000명이 넘는 시위대가 조직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18일부터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위수령 발동, 무기한 휴교 조치, 공수부대 동원 등을 통해 강력한 진압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이 다치고, 생명을 잃었다.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당시 권력 핵심부에서는 문제의 해결책을 놓고 양편으로 갈라서서 심각하게 대립하던 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10.26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부마민주항쟁이 결정적인 촉매가 되어 박정희 유신독재체제는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10.26사건 이후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한국의 민주화과정은 다시 저지되었고 1980년 5월 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광주의 비극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마민주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시민운동세력은 군사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지속하였다. 그결과 마침내 1987년 6·10민주항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2023년 10월, 제 44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일을 맞아 44년전 이곳 창원·마산에서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던 민주주의 정신을 기억하고 계승해야하는 것이 이곳에 살고있는 우리가 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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