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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수 기자. | ||
인간의 삶은 모래시계에 비유된다. 모래시계 위에 있는 모래가 밑으로 떨어지듯이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줄어든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시간이 흘러가기보다는 없어지는 것으로, 사람은 어렸을 때는 앞으로 가는 시계를 빨리 안 간다고 재촉했지만, 늙어가면서는 뒤로 천천히 가는 시계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認知常情)이다.
최근 통계적으로 여성 노년인구가 훨씬 많지만 할머니들은 오라는 데도 많고, 갈 데가 없으면 집안일이나 거들고 애들도 돌봐 줄 수 있지만 할아버지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상대적인 것처럼, 노년과 상대적인 것이 유년이다. 근대 이후에는 전자에서 후자로 사회적 무게 중심이 이동했다. 전통시대에 가부장적인 유교는 연장자 중심의 위계질서로 사회를 구성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온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으면 웃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식사가 시작되고, 맛있는 반찬은 그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 집안 내에서 할아버지와 자식 가운데 누가 더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가? 연로한 촌로(村老)가 도시 아들집을 찾았다. 머무는 며칠 동안 집안 사정을 들여다보니 최고의 '어른'은 손자였다 했다. 그다음이 며느리고 세 번째가 가장인 아들, 네 번째가 애완견(犬)이였고, 자신은 맨 꼴찌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가면서 아들에게 "3등 애비야, 잘 있어라. 5등은 간다"고 했다고 한다. 보기에 얼마나 보기 거북했으면 자식 앞에서 한소릴 했을까 싶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어른의 존재가 사라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지난 1970년대 초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 '우리의 가족제도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다'고 한 적이 있다.
그가 우리 가족제도를 이처럼 높이 평가한 것은 가족 구성원간의 유대와 질서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석학의 눈에도 우리 가정엔 분명 어른이 존재했고, 그 어른이 가정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눈에 읽혔던 것이다.
어른은 꼭 무었을 많이 알거나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집안의 구심점이었기에 모두 권의를 인정하고 복종했다.
그래서 어른은 병들어 누워 있어서도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가족이 핵가족으로 분화되면서 어른들의 공간은 그 어디서도 찾을 길이 없다. 우리사회에서 효(孝)만큼 장려되고 강요된 사회적 덕목은 없었다.
효의 지표는 부모가 나이 들거나 고통 받을 때 어떻게 봉양해야 하는 가로 요약된다. 70세 노인이 부모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는 춘추시대 노래자(老萊子)며, 지옥에서 고통 받는 어머니를 구했다는 불교의 우란분경(盂蘭盆經)이 모두 그렇다. 효는 우리에게 덕목인 동시에 노인 문제를 해결하는 복지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많은 어버이는 자식들에게 천덕꾸러기가 돼 가고 있다. 효가 미덕이라는 말도 박물관에서 찾아야 할 세상이 됐다.
최근 노인들이 자식에게 맞거나 버림받는 노인이 해마다 늘어 2009년 학대 신고는 151건서 2010년 5월까지는 171건으로 70건이 늘었다는 통계다.
지난해 접수된 노인 학대 가해자 172명 가운데 아들이 92명으로 50% 이상을 차지했고, 딸 · 배우자 · 며느리 순이었다. 유형별로는 정서적 학대가 145건으로 가장 많았고, 신체적(64건)·경제적(25건), 학대 · 방임(22건)이 뒤를 이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인간 수명을 거의 100세까지 연장시켜 나가고 있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인간은 행복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제 인류에 필요한 건 오래살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노인들을 공경하며 행복한 삶을 함께 누리도록 지혜(智慧)를 모을 때다.
김용수 yskim0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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