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의 풍경과 신비 

 - 신동일(申東日) 시인/수필가 -

지난 어느 날 늦은 봄날의 진도 풍경이 차창가로 스친다. 들판 건너 저 머얼리 산 골 골에는 농부들의 풍년가가 귓가를 스치기에 속계를 떠나 자연에 묻히는 이 순간만은 이 보다 더 행복하고 평화로운 순간이 어디 있으랴. 생동하는 한 폭의 풍경화가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드리워진 듯.

곳곳에 散在된 名所를 기행하면서 오르며 내리며 굽어진 산길 따라 기다보니 아니, 저곳이 신비의 바닷길이 아니여! 차창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이 광경! 모래알처럼 수많은 인파가 바닷물 한가운데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현장의 인파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주차장에 늘어선 차량들은 장마철 홍수가 범람하는 수해 현장을 보는 듯, 내 생후 처음 보는 엄청난 장면이로다. 그 숫자는 육안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짐작조차 어려워서 마치 인간 파도를 이루는 장면이네! 이미 주차한 차량들이 빼곡하여 주차할 틈을 찾느라 한참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렵게 주차시키고 10 여분 걸어서 신비의 현장에 도착한 순간, 마치 인류 사상 최초 유인우주선 아폴로 11호의 암스트롱 선장이 신비의 달나라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의 설레임처럼, 드디어 집에서 출발 후 4-5시간 만에 진도의 명소 신비의 바닷길 현장에 도착했다. 조병화 시인은 [진도찬가]에서

   진도는 정이 붙는 섬이요
   진도는 정이 붙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섬이고
   진도는 정이 흐르는 흙이요, 물이요, 산이요, 들이요 개울이요, 집들이요,
   마을들이요, 농토들이요,
   정이 출렁거리는 바다에 싸인 섬이더라.
   들리는 것이 육자배기요, 흥타령이요, 남도민요요
   바람이 판소리, 구름이 판소리...

시인은 일찍이 진도가 보배로운 섬임을 체험하고 이르는 곳마다 대자연의 신비와 운치 있는 예술적 미를 갖추었기에 그 광경을 시 한 수로 잔잔하게 수놓았구나. 밀려드는 인파로 일행들도 동행하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행인들 간에 부딪치는 일은 흔한 일이요, 만약 핸드폰이 없다면 사람 찾는 일마저 어려우니 요사이 문명의 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신비의 바닷길은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古郡面 回洞里)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약 2.8km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수심이 낮아질 때 바닷길이 열리는 현상으로 그 폭은 40여m의 너비의 길이 바다 한가운데가 갈라지는 곳이기에 그 경지에 넋을 잃는다.

바닷물은 하루 두 차례씩 들고 나며 조류의 속도나 태풍 등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바닷길이 형성된다고, 그래서 매년 이맘때면 이 현상을 보기 위해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이 몰려와 바닷길이 드러나는 기적의 현장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탄성이 저절로 난다. 필자도 경이로운 순간을 감추지 못하고 호기심에 갈라진 바닷길 복판으로 직접 들어가서 조개를 주워보았는데 수많은 인파들은 폭염도 잊은 채 놀라운 눈빛으로 와 ~ 탄성을 지르며 장거리의 바닷길을 건너는 사람, 손에 손에는 호미를 들고 바지락이나 조개 그리고 굴 등을 캐는 모습들이니 이러한 광경을 세계 어딜 가서 볼 수 있으랴!

해마다 진도군은 축제 기간을 마련하여 국내외 관광객들을 맞아 진도 고유의 민속예술인 강강술래, 씻김굿, 들노래, 다시래기 등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를 선보이고 다양한 이벤트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볼거리 행사를 치루고 있어 매년 이때마다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추세라는데, 때마침 숨이 막히는 찜통의 한여름 오후인데도 민속 공연이 한창이었고 객들이 북적댔다.

필자는 의아해서 이 같은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은 언제부터 알려진 것일까 알아보니 지난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 씨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씨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란 가요를 불러 히트를 하면서 일본 관광객들이 급증하고 있단다.

그런데 바다가 둘로 갈라지는 이런 현상은 그럴만한 전설이 전해온다. 바닷가 주변에 조그만 사당이 있기에 확인해 보니 사당 내에는 할머니 한 분이 영정으로 모셔져 있고, 바로 일컬어 뽕할머니라 하는데 그 영정은 진도 출신 동양화가 옥전(沃田) 강지주 화백이 그렸으며 그 방문을 열면 기적의 현장인 신비의 바다를 굽어볼 수 있으며, 바닷길 입구에는 지난 2000년 4월 제작된 뽕할머니의 상징 조형물과 전설 및 유래가 새겨진 비석이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기념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바로 현장으로 발길 돌리는 순간인데 내국인만이 아닌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외국인과 키가 작고 작은 체구의 피부색이 까만 동남아인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실제 목격한 바닷길은 생각한 것처럼 그 바닥이 뻘밭 같은 진흙이 아니었고 온통 암석으로 되어 있어서 사이사이에 숨겨진 소라와 바지락, 자잘한 조개 등을 캐는 장면이 연출되었고, 어떤 이는 제법 비닐 자루에 가득 채워 자랑하는 사람도 눈에 띠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장면은 남북으로 갈라진 긴 바닷길을 오가는 행렬이 마치 장사진이라 하기에 충분했고 그 숫자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여서 어림잡아 수십만 명인 것 같다. 벌써 작열하는 태양의 햇살도 서산에 걸려서 기력이 쇠한 채 저녁놀로 물들어 가는데도 몰려드는 인파들은 그칠 줄 모르네. 다음 코스가 기다리고 있기에 아쉬움을 떨치고 발길을 돌려 빼곡한 인파를 가르면서 빠져나오는 동안 차창에 어른거리는 신비의 현장을 다음 기회에 또 오리라고 새기며 뒤를 보고 또 돌아보았다.

처음으로 진도에서 하룻밤을 일박하고 길잡이의 안내를 받아 남도석성을 향했다. 한참이나 굽어진 산허리를 돌아 당도한 곳이 우리나라 전통가옥으로 형성된 낡은 초가 마을이 자리를 차지한 곳. 초가마을을 빙 둘러 묵중한 돌담으로 쌓은 웅장한 성이 곧 남도 산성이란다. 다른 지방에 비하면 당국의 투자가 전혀 없던 탓인가, 자연 그대로 방치해 놓은 듯 城 주변에는 잡초와 잡목만이 얼기설기 무성하고 동네 한가운데는 아직도 그때 그 고을의 현감이 집무했던 곳인 듯 빛바랜 관청 건물 몇 채만이 주인 잃고 외롭게 난세의 어지러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주변을 한참 돌다가 4-5미터 높이로 축조된 성 위에 올라서 앞을 바라보던 순간 때마침 불어오던 시원스런 바닷바람이 무더위에 흐르던 땀방울을 식혀 준다. 예나 지금이나 만경창파의 잔잔한 물결은 유유히 흐르고 그 위로 자그만 조각배들이 두둥실 떠다니며, 쪽빛 허공에는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평화롭게 노닐더라. 석성 위쪽에는 아직도 왜적과 싸웠던 소총이나 대포를 배치해 놓은 자리가 그대로이고 바로 이 위치에서 선조들은 국토를 수호하기 위해 적과 맞서 싸우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며 희생을 했을까 상상케 하더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태평성대에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삶인데 과연 선인들의 호국정신에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

다음은 진도가 낳은 최고의 보물이며 인간문화재의 산실이고 그 찬란한 자취가 자연 그대로 보존된 곳 바로 운림산방(기념물 제51호)이란 곳에 당도했다. 전통남화의 성지라 할 수 있는 산방(山房)은 조선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유(1808-1893)선생이 말년에 거주했던 화실의 당호이며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불렸으며 남종문인화의 본산이기도 하다. 진도의 명산 첨찰산이 부채살처럼 펼쳐진 자락 중턱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그의 산방 아래쪽에는 선생의 무료함을 달래주던 연못이 그대로인데 못 가에는 아직도 당시에 노닐던 잉어들이 세월 가는 줄도 잊은 채 자유스럽게 물가를 가르고 못의 한 중앙에는 아직도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백일홍 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비록 주인은 없어도 주변의 청아한 자연의 메아리와 울울한 산림(山林)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산새들의 합창만이 길손들을 반갑다 맞는다.

산방에 이른 순간 마치 고즈넉한 산사에 발을 딛은 듯 조용하다. 넓직한 잔디밭 평원에 주변이 너무나 고요하고 적막했는데 불과 14평의 초려삼간과 사랑채 그리고 서실만이 주인 없는 외로움을 달래더라. 손수 한 층 한 층 쌓았는지 섬세한 손길이 묻은 듯한 돌담이 주변을 애워싸고 있었고 바로 이곳에서 허유 선생이 공부를 했구나. 비록 남쪽의 맨 끝자락인 낙도에서 출생했으나 천부적인 예술적 기질과 강인한 의지로 시(詩)서(書)화 (畵)에 역사적인 한 획을 그었으며, 훗날 조선 후기 三絶이란 칭호를 받을 만큼 칭송을 받은 바, 약관 20대에는 대흥사의 초의선사와 조선 당대의 서체(書體)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를 익혀 남종문인화의 대가에 이른 것이다.

선생은 40세 불혹의 나이에 헌종을 직접 뵙고 헌종이 쓰던 벼루에 먹을 찍어 화선지에 수를 놓았다는데 특히 대원군, 민영익, 정학연 등을 비롯한 권문세가들과 어우러져 음풍농월(吟風弄月)했으며 화선지에 직접 글을 써서 드린 바도 있단다. 1856년 추사 선생이 별세 후 허유 선생은 귀향하여 산수가 수려한 첨찰산 아래 쌍계사의 남쪽인 이곳에 터를 잡고 화실에서 화폭에 혼을 쏟으며 여생을 보냈다. 비록 선생은 유명(幽明)을 달리했어도 그의 직손들은 시세에 현혹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예술가의 위업을 계승했다는 점이 한층 자랑스러웠다. 山房의 건너편에 우뚝 자리 잡은 현대식 건물이 손짓하여 가서 보니 소치기념관이구나!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자 그의 가계도(家係圖)가 눈길을 끌었고, 대대로 이어진 직손들은 선친의 고귀한 얼과 위업을 계승한 듯 서예가와 화가들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로다. 직계로는 아들 미산 허영,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 손자 임전 허문 4대에 이르고, 또한 방계로는 의제 허백련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예술적 혼이 대를 이었으며, 그의 화풍에 뿌리를 둔 자손들은 운림산방을 정신적인 고향으로 삼아 훗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학자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의 화풍에 젖은 많은 제자들은 정열적으로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단다. 기념관 안쪽에는 선생 가족들의 걸작들로 공간을 가득 메웠는데 특히 행인들의 발목을 잡고 넋마저 앗아간 곳은 그의 후손 작으로 4폭짜리 병풍에 그려진 묵화였다. 아마도 진도의 경치를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변화되는 절경을 담은 것으로 실제의 자연인지, 인간의 창작품인지 분간키 어려워 잠시 필자도 혼을 잃는 순간 시상이 솟구쳤다..

  화폭에 담긴 山川은
  산인가 강물인가 구름인가
  이백과 두보가 잔 권하며 음풍농얼하던 동정호인가
  만중운산에 피어오르는 것은
  연하(煙霞)인가 운무(雲霧)인가
  잔잔한 호수가의 물안개인가
  산골집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연기인가
  골 골에서 쉼 없이 피어오르니  분간키 어렵구나.

자연의 신비로운 황홀경에 매료된 적은 있지만 인간이 창작한 화폭의 세계에 넋을 잃은 적은 아마도 이 순간이 처음 일이어라. 에머슨은 “인간의 고상한 욕망은 자연으로부터 만족한다”고 했다. 즉 누구나 미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연으로부터 갖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세계를 코스모스라 했으니 이것을 美’라 불렀다 한다. 만유(萬有)의 구성, 혹은 인간의 눈이 갖는 조형적 능력은 이러하기 때문에 천.지. 수목. 동물과 같은 원시적 물상들은 그것만으로써 인간에게 일종의 기쁨을 주는 것이다. 즉, 윤곽, 색채, 운동, 집합에서 오는 일종의 쾌감이요, 아무리 하찮은 물상이라도 강한 빛을 받아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고 그 강한 빛이 오관(五官)에 미치는 자극과, 그것이 공간과 시간만큼이나 갖는 일종의 무한성은 모든 물상들을 화려하게 만들고, 시체에 조차 그 독백의 미가 있음이라.

화폭에 담긴 예술적 혼이 너무나 생동감이 있어 山川이 실제와 분간키 어려운 것은, 화선지에 수놓은 산수화의 작품세계는 보기 드문 예술적 혼과 美의 세계가 조화된 일품이었다. 화폭의 세계가 실제인지, 예술품인지 분간마저 어려운 점은 산자락의 봉봉마다 만학의 크고 작은 층층마다 만경유리의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섬과 같고, 산의 중턱에서 피어오르는 운무는 움막에서 새어나오는 연기와 같네.
 
구름 속을 자유롭게 비상하는 갈매기 한 쌍은 마치 쪽빛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일엽편주에 의지하여 낚싯대 드리운 풍류객인 양 시름없이 유유자적하는 강태공과 같네. 산중에 뭉게뭉게 일렁이는 구름떼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굽이쳐 흐르고, 수목이 울울한 산중에 희미한 모습의 노옹 한 분이 띠기에 누군가 했더니 불도를 닦는 노승의 차림새구나.

회색 도포자락에 도롱이 걸치고 삿갓 깊게 눌러 쓴 모습으로 등에는 공양미로 가득 찬 배낭을 맨 채 산사를 찾는 모습이니 이미 속계의 잡념마저 떠난 지 오래여라. 다른 한편에 8폭짜리 병풍에 수놓은 서체를 감상하면서 순간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을 본 듯 한참 동안 분별함에 시간이 소요되어 글씨에 빠졌는데, 그 서체의 독특한 점은 난해한 해서체가 아니고 선이 굵고 정자체여서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추사선생의 문하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기에 아마도 추사선생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듯, 추사선생의 올곧은 성품과 선비의 기질을 그대로 반영한 자체(字體)가 아닌가. 기념관에 진열된 화폭의 예술적 경지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갈 길 재촉하는 소리에 정신 차리니 벌써 서산의 해가 산 중턱에 걸렸기에 아쉬운 발걸음 돌려 억지로 차에 올랐으나 멀어져가는 운림산방과 기념관을 서운한 마음으로 뒤돌아보면서 언제 다시 이곳에 올 것인가!

우리의 가락과 미와 예술로 조화된 남쪽의 조용하고 외딴 섬, 진도! 다시 찾고 싶은 기행지 진도를 뒤로하고, 굽이굽이 산허리를 휘감은 산길을 헤쳐서 다시 목포에 이르러 호남고속도에 진입하자 미끄러지듯 달리는 차창으로 펼쳐지는 산천을 대하는 동안 피곤이 밀려오는 지, 지그시 감겨지는 눈 속에서도 바로 전에 감상했던 명승지와, 운림산방의 예술세계, 그리고 신비의 바닷길이 영화로 보는 듯 필름이 돌아간다.

대대손손 선조의 위대한 예술관을 계승한 집안이 어디 흔한 일인가, 소치선생의 집안은 한국 역사에 길이 빛날 참으로 위대한 인간문화재 집안이기에 저절로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많은 세월이 흐르고 또 광음(光陰)이 반복되어도 선생이 남긴 서체와 화풍에 담긴 예술적 혼은 영원하리라. 그 날의 여정 ‘보배로운 섬’ 진도의 문학기행에 빠지는 동안 조석으론 시원한 산바람이 문틈으로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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