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코리아저널/ 경북=김상태기자]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이른 새벽부터 등산과 헬스를 주로 했지만, 요즘은 새벽 3시만 되면 어김없이 포항 북부 해수욕장에서 '승마운동'을 즐기고 난후 하루일과를 시작”합니다.

▲ 포항UA컨벤션 장기현사장,
중학교 시절부터 신문을 배달 하기위해 새벽에 일어난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UA컨벤션’ 장 기현 사장(46)이다.
지난 18일 오후, 포항시남구 대이동 UA 컨벤션2층 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첫 인상은 40대 중반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귀 공자’ 같은 인상이다.
깔끔한 외모와 단정한 옷차림으로 보아 평범한 샐러리맨이나 공무원 같아 보였지만 포항에서 100여명의 직원과 함께 대형 웨딩홀 2곳이나 경영하는 최고CEO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러 받은 재산으로 최고 경영자가 된 것은 아니다. 성장 과정 속에서 어려움도 많았다,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불굴의 투지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한 기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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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UA컨벤션 장기현 사장이 시사코리아저널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 ||
그의 꿈은 경찰 공무원 이었다. 중학교 재학 중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창 뛰어놀고 지쳐 쓰러져 깊은 단잠에 빠져야 하는 그는 새벽부터 일어나 신문을 돌려야 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낮에는 분식집에서 배달을 하고, 새벽이면 신문을 돌렸다. 그러면서 학업은 포기 하지 않고 검정고시 공부로 ‘주경야독’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포항역 앞 광장에서 돌리다 남은 신문을 팔고 있는데 외삼촌이 포스 코 통근 열차에 내리면서 그를 본 것이다.
어린 조카가 공부 할 시기에 신문판매 하는 일이 안타까운 나머지 그에게 ‘동지 상고 야간부’에 들어갈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외삼촌의 권유로 동지 상고 야간부에 입학, 그러나 학비는 벌어야 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파출소 사환이었다. 경찰관들이 시키는 업무에 성실하고도 최선을 다해 2년간 열심히 했다.
겨우 고등학교는 졸업 했지만 대학갈 형편은 아니었다. 그는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삶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고민 끝에 결정한 일이 포항 남빈동 4거리 ‘서진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취업한다. 하는 일은 배달과 비디오 촬영이다.
당시 주 거래처는 명성, 경동, 남도 예식장등 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생에 한번뿐인 결혼식을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나이 20살 웨딩에 대한 비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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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UA컨벤션 장기현사장, | ||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는 일이 몸에 밴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그로부터 7년 후, 마침내 ‘서진 비디오’ 가게를 인수해 자립한다.
종업원으로 일을 하다 처음으로 사장이 된 그는 7년 동안 현장에서의 경험을 살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공격적인 경영을 펼친다.
사장이 된 그는 아내와 함께 웨딩샵에서 일한다, 아내는 웨딩샵에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청소, 신부 드레스 세탁, 손님맞이 등 굳은 일은 도맡아 했다.
부부가 합심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제법 사업자금도 모았다.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사진과 비디오, 웨딩, 스튜디오를 갖춘 매장을 열기위해 2000년 죽도동 귀빈 예식장 옆에다 대지 100평을 매입하고 건물을 신축했다.
아내와 눈코 뜰 새 없이 죽으라고 일을 했다. 개인의 생활은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로 부부는 오직 한길 앞만 보고 달려 왔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2006년 죽도동 귀빈 예식장이 ‘경매’에 나왔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사정에 있었지만 웨딩산업에 비전 보았기에 경매에 나온 예식장을 과감하게 인수 했다.
기존 업체들과 경쟁에서 이기려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경매로 인수한 귀빈예식장 건물의 골조만 남기고 실내와 외벽을 국내 최고의 시설로 1년 동안 리모델링 했다.
격조 높은 시설로 오픈하자 예상대로 결혼수가 타 업체보다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식장 한곳으로 성이 차지 않았다. 이듬해 대이동 시청 옆 부지를 매입하고 대형 컨벤션을 짓기 위해 허가를 신청 했다.
그동안 순탄하게 잘 되어가던 웨딩사업은 때 아닌 암초를 만난다. 대이동 UA컨벤션 신축 인근 아파트 주민들이 날마다 반대하며 시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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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UA컨벤션 장기현 사장, | ||
막대한 사업 자금을 투입해 시작하는 일에 주민들의 결사반대로 공사가 중단되자 눈앞이 캄캄했다. 혼자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도 않고, 공사가 언제 재개될지 기약 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엎친데 겹친 격으로 모친과 아내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유방암’으로 서울 삼성 병원에서 나란히 ‘수술’을 받았다.
그때일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다고 했다. 혼자 처리하기에 너무 힘들어 울기도 많이 울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잊으려고 추운 겨울날 매일 새벽 3시 칠흑같이 어두운 양학 산에 등산을 갔다. 양학 산 철탑 정상 낭떠러지에서 뛰어 내려 죽고 싶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주민 민원으로 죽으면 그동안 이를 악물고 아내와 고생 고생해서 이루어 놓은 모 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차마 죽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 왔다.
참고 인내(忍耐) 하면서 반대 주민들의 민원을 하나하나 실타래 풀듯이 풀어 나갔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기다림 끝에 드디어 2010년 UA컨벤션의 모든 공사를 마치고 마침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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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UA컨벤션 장기현 사장, | ||
그는 1967년 12월 포항 토박이로 남구 해도동에서 인천이 고향인 아버지 장종연씨(77)와 어머니 구준회(72)여사 사이에서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포항강원산업 공장 초창기에 입사하여 ‘주물 기술자’로 20여 년간 근무했다. 장 사장은 그다지 부유한 가정은 아니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과외도 받고 자랐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직장 생활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한잔 두잔 즐겨 마신 약주가 너무 과해 ‘알 콜 중독’이 되었다.
아버지는 마침내 직장을 그만 둬야 했다. 그때부터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그길로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장의 일을 맡아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된다.
어머니의 돈 벌이로 4남매 공부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린 그는 중학교시절부터 새벽이면 일어나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신문을 돌렸다. 신문을 배달하고 나면 남는 신문이 있었다. 그길로 집에 가지 않고 곧 바로 포항역으로 달려가 ‘신문’을 팔았다.
당시 형과 함께 신문을 배달했다. 형은 때로는 하루 이틀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 마다 동생인 그가 형의 신문까지 배달했다.
형은 신문 배달이 부끄러웠다. 장 사장은 어릴 적부터 매사 일에 좌절 하지 않고 항상 적극적인 사고로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 생활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조용하고 차분한 내성적인 성격이지만 타인과의 모든 약속에는 완벽하고 철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동아건설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아내 이유애씨(41)와 지난 1996년 결혼,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큰딸과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딸을 두고 있다.
장 사장은 고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지만, 1998년 한동대학교 경영학과를 거처 경주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현재는 동국 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그는 매년 대이동과 죽도동에 거주하는 불우한 이웃들을 초청하여 그가 경영하는 웨딩홀에서 정성을 다해 식사를 대접하고 내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다문화가정, 장애인 합동결혼식에 비용을 제공하는 등 포항종합복지관 어린이재단 후원회 이사로도 활동 하고 있다.
그는 포항 출신으로 영흥 초, 포항 중, 동지 상고를 졸업했다. 지역의 선, 후배, 지인들에 이르기까지 ‘웨딩홀’을 이용하고 난후 찾아와 따뜻한 격려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그동안 고생한 일들이 봄눈처럼 녹아내린다고 했다.
그의 남은 계획은 포항지역에서 웨딩 사업을 통해 고용창출효과와 예식산업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면서 어려운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싶다고 했다.
김상태 기자 iptv82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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