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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호 칼럼] 여물어; 시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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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4.12.01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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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정호 /대전대학교 교수

[시사코리아저널=이선우 기자] 내가 사는 동네에 참 멋스러운 호수 하나가 있다. 왕송호수!

코로나-19 시기에 헬스장에서 운동을 못하게 돼서 집 인근에 산책이나 걷기 운동할 만한 곳을 찾던 중 왕송호수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주말에 시간을 내서 호수 한바퀴를 돌아보았다.

경치도 좋고 군데군데 공터를 놀이터나 생태공원을 꾸며놓고, 레일바이크 시설 등을 설치해서 나름 인근에서 소문난 산책길이기도 하단다.

 그 지역으로 간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이제서야 알게 되다니...
자연이라는게 그렇듯이 이 왕송호수 산책길도 계절따라 나에게 보여주는 자태가 다르다. 

봄이면 왠지 기지개를 켜는 듯 새로운 호흡을 하게 하는 느낌을 주고 여름이면 생그러움과 쨍쨍한 기운을 돋구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가을에는 그간 수고로움을 위로하듯 한 폭의 그림을 선사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겨울이면 가슴 깊이 호흡하게 하는 신선함과 청량함을 맛보여주기도 한다. 

집에서 왕송호수를 한바퀴 돌고나면 약 8km인데, 이 거리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생각을 버리게 하는 시간도 된다. 

그럴 때면 이 왕송호수는 나만의 또 다른 연구실이 된다. 얼마 전부터는 워킹 메이트가 생겨서 한층 풍성한 시간이 되고 있다. 

호숫가에 핀 꽃의 이름을 물어보고, 물고기를 잡아먹는 새의 이름을 알아보고 레일바이크의 페달을 밟으면서 서로 힘을 덜 준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면서 우리 부부의 중반부 이야기를 채워가고 있다. 
10월 늦은 가을에 호수로 가는 중에 논이 황금빛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벌써 계절이 이렇게 되었나? 하는 생각으로 논둑에서 벼를 만지면서 무심코 나온 한마디 “벼가 여물어 가네.”

호숫가에 다다라서는 산책로 옆 야생풀들로 덮여 있던 산이 어느덧 누리꾸리한 잎사귀와 줄기로 덮여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봄, 여름에는 아주 상큼한 초록색으로 덮여 있어서 나름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야생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이 나던 길이였다. “에구, 이제는 다 시들어 가네.”

집에 와서 샤워를 끝내고 서재 책상에 앉으니 산책 중에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여물어 간다, 시들어 간다.” 똑같은 식물일텐데, 나는 벼를 보고 여물어 간다고 했고 야생풀을 보고는 시들어 간다고 했다. 

나는 무슨 뜻으로 이 둘을 구분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벼는 쌀이라는 이로움을 인간에게 주고 풀은 주는 것 없어서가 아닐까? 그래도 둘 다 봄 여름에 우리에게 푸르른 싱그러움을 선사했건만...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평생을 살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떤 이는 후손에게 이로움을 남길 것이고 어떤 이는 기억도 없이 갈 것이다. 

인간관계는 또 어떤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관계가 여물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시들어 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여보, 우리는 여물어 가는 것 같애, 시들어 가는 것 같애?”
“승헌아, 내가 너한테는 여물어 가는 넘인 거지?”
“하나님, 제가 혹시 당신의 반대 방향에서 시들어 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한 번쯤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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