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0·26 재보선이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보다는 지원에 나선 대선주자들이 더 주목받는 ‘주객이 전도된 이상한 선거’로 흐르면서, 14개월을 앞둔 대권경쟁이 조기에 가열되고 있다.
특히 서울시장 보선은 그동안 이어져 온 중간선거, 재·보궐선거, 서울시장 선거의 기존 문법들을 모조리 깨뜨렸다.
이와 함께 대통령 선거와 대통령 선거 사이의 중간선거에서 나타났던 '정권 심판론 대 안정론'의 대결구도는 실종됐다. 야권에서는 끈질기게 정권 심판론을 들고 나왔지만 좀처럼 먹혀들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한국 선거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선거로 남고 있다.

후보보다 더 주목받은 지원군 ‘잠룡’

이번 재.보선에는 박근혜·안철수·문재인 등 여야 거물급 대선주자들이 한 무대에 섰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예비대선 전초전의 서막이 올랐기 때문이다.

3명 모두 내로라하는 대선주자들 가운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현재까지 여권의 유일무이한 전통의 강호이자 여야를 통틀어 부동의 1위를 고수해 왔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돌풍처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뛰어들었다.
안 교수의 바람은 본인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공할 정도여서 정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여기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광을 입고 있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범야권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면서 대선주자로 주가가 급등세다.

이들 3인방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첫 대결을 펼치면서 선거결과로 인한 대미지는 입을 수 있겠지만 일단 부상한 잠룡의 입지는 확보한 셈이다.
이번 선거에서 자l타가 인정하는 군소 잠룡들은 저마다 입지확보를 위해 동분서주 했지만 이들 3인방을 제외하고는 침체일로를 걸었다.

대권후보 나서자 구도변화

당초 여야는 너나 없이 이번 선거가 철저히 '심판론 대 안정론'의 대결구도로 치러질 것으로 내다봤다. 박 후보를 단일후보로 내세운 범야권은 선거전 초반 '서울시장 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내년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승리하고 12·19 대선에서 정권을 교체하자'는 메시지를 확산시켰다. 나 후보가 대규모 동원 유세를 지양하고 가급적 각개격파 식으로 현장을 누비는 선거운동을 벌인 것도 선거구도가 '심판론 대 안정론'으로 흐르면 필패라는 판단 때문이다.

선거 이전부터 불거졌던 대통령 측근 비리, 뒤 이은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땅 매입 논란 등 '심판론'이 힘을 받을 소재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달리 선거전 초반부터 나 후보 측과 한나라당의 '박원순 검증론'이 먹혀들어 판세가 요동쳤고 수세에 몰린 범야권도 뒤늦게 '나경원 검증'으로 맞불을 놨다.

그렇지만 이 이면에는 박근혜와 안철수 자리잡고 있어 실제 나경원.박원순 두 후보는 그늘에 가려져 선거 현실이 예측을 빗나가게 한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박근혜, 선거판 나서자 상황 급반전

이 상태에서 잠룡들의 대권 방정식을 해부해 보면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경우, 처음에는 선거에 등판하는 것을 꺼리는 듯,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출진과 함께 상황은 급 반전됐다.
너무 일찍 전면에 나서는 탓에 ‘잘 해야 본전’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일찌감치 이번 재보선 지원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하고 안팎의 불만요인을 일거에 잠재웠다.
박 전 대표가 나 후보 지원에 나선 것은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원 유세 이후 거의 4년여 만의 일이다.

그렇지만 서울 뿐 아니라 전국을 순회하면서 얻어지는 자신감은 선거의 승패를 떠나 많은 소득이 있었다는 자체 평가다.
국민앞에 잘 드러내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전국 각지에 도착할 때마다 구름같은 인파가 몰려들어 박 전 대표의 인기를 실감하는 계기가 마련됐고, 접촉 방식도 다양해져 전국적으로 득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나라당 지도부에서는 일단 재보선 승리에 초점을 맞춘 지원을 당부하면서, 이 가운데 사실상 성패를 가를 서울시장 선거에 집중해줄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지도부가 서울을 4개 권역으로 나눠 6일 동안 지원해 달라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6일이라는 시간은 사실상 선거기간의 절반가량으로 서울시장 선거에 주력해 달라는 지도부의 의중이 담겨 있었다는 분석.
박 전 대표는 그러나 서울과 지방을 오가면서 광폭적인 지원유세를 펼쳤다.

서울시장 선거의 경우 상징적 의미나 중요도 측면에서 다른 곳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판세를 뒤집을 가능성이 있는 곳에 대한 지원을 외면할 수만도 없다는 현실적 이유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렇지만 이왕 칼을 빼 들은 이상 전국을 돌며 대국민 스킨십을 강화하려는 욕심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박 전 대표의 행보가 이를 입증했다.

여기에는 박 전 대표가 서울시장 보궐선거까지 하게 된 기저에 한나라당의 잘못이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반성과 자성의 모습을 먼저 보이는 것이 수순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점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박 전 대표가 이처럼 전국을 무대로 뛴 까닭은, 바꿔 말하면 선거결과에 따른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인다.

당 지도부의 바람대로 박 전 대표가 서울시장 선거에 ‘올인’할 수도 있었겠지만, 박 전 대표가 안게 될 정치적 후폭풍이 예상 외로 심각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때문에 박 전대표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천막당사 시절의 초심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며, 두 마리 토끼 잡기 선거전을 펼쳤다.

사공 많은 야권, 파열음 우려?

민주당은 물론 문재인 노무현 재단 이사장과 안철수 교수 등이 박원순 후보 지원에 나선 범야권 진영도 속앓이를 했다.
범야권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까지는 좋은데 저마다의 정치적 계산이 다른 지원세력이 많은 탓에 자칫 파열음이 나서 오히려 선거결과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총괄할 선거대책위원회 구성을 둘러싸고서 이 같은 파열음은 본격화 됐다. 민주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야4당이 공식 선거운동 개시 전부터 박원순 후보 선대위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듯한 꼴을 보였기 때문이다.

범야권 후보인 박 후보에 대한 야권의 지지는 당연한 수순이지만 이처럼 야4당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민주노동당이 나서지 않게 된 배후에는 민주당이 꼽히고 있다.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가 “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상임 선대위원장으로 돼 있고, 선거 사무원들도 민주당이 대부분”이라며 “모양은 야4당과 시민사회로 돼 있지만 박 후보도 민주당의 협조를 얻기 위해 민주당의 요구대로 들어주는 양상으로 보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놓은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도 “민주당이 단일화 경선에서 패배한 이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다 박 후보가 민주당의 협력을 끌어내려고 주도적 노력을 부탁하자 이를 계기로 주도하겠다면서 다른 야당과 시민사회를 소외시켰다”고 주장하며 반발했다.
물론 유 대표와 진보신당 김혜경 대표는 균열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박 후보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기로 했지만 균열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문재인, 마침내 선거판 데뷔

이처럼 범야권 세력이 파열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이제 관심은 기성 야당 외의 정치세력에 모아지는 형국으로 진행됐다.
그 중심에는 그 동안 범야권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해 왔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있다. 문 이사장은 10월26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박 후보 지원 유세와 부산j 동구청장 선거 지원에 나서는 것을 계기로 사실상 선거 데뷔전을 치렀다.

문 이사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범야권 박원순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 부산 동구청장 재선거에서 민주당 이해성 후보의 후원회장을 각각 맡았다. 문 이사장이 선대위 직책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작년 10·28 경남 양산 국회의원 재선거 때 민주당 송인배 후보의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 지난 4·27 김해을 보궐선거 때는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후보 단일화 협상을 도출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지만 선대위에서 별도의 직책을 달진 않았다.
문 이사장이 작년 양산 재선거 때 후보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기자회견 참석 등 다소 소극적인 지원에 나섰다면 이번에는 선거유세 지원 등 선거전의 전면에 나서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다.

그동안 문 이사장은 각종 선거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지만 이처럼 적극적으로 나선 까닭은 이번 재보선이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민심의 흐름을 읽는 풍향계 성격이 있는데다 여야 간 정국의 주도권 다툼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아울러 박원순 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이번 재보선이 향후 야권 대통합 논의의 진전을 위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야권 진영에서 나오고 있다.

실제 문 이사장은 야권 대통합 논제를 놓고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경쟁하고 있다.
그는 현재 야권 대통합 추진기구인 혁신과 통합의 상임대표로서 대통합 논의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문 이사장이 부산에도 주력한 까닭은 특히 부산 동구청장 재선거는 민주당이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부산·경남(PK) 지역에서 문 이사장의 영향력이 평가되기 때문이다.

안철수 교수의 거취

문재인 이사장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관심을 끄는 준정치인은 바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박원순 후보를 있게 한 장본인이 바로 안 교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번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 미칠 그의 영향력은 새삼 논할 필요가 j없다는 분석이다.

안 교수는 그러나 선거를 이틀 앞두고 선거전에 뛰어들어 다소 피동적이었다는 지적과 함께 마지막 상황반전의 효과를 최대한 노렸다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다.

그렇지만 이번 선거를 빅원순 승리로 이끈 가장 큰 공신은 안철수 라는 사실은 자타가 부인할 수 없는 만큼, 절묘한 시점에 대권 후보로 급부상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소 잠룡들 ‘시들’

이밖에 한나라당 정몽준 전 대표를 비롯해 이재오 의원, 민주당 정동영. 정세균 의원 등은 관망세로 돌아섰다.
그나마 손학규 대표는 박영선 의원과 무소속 박원순 후보의 경선에 주력했으나 민주당 패배로 결론나자, 사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하는 바람에 데미지만 입었다.
이후 박 후보를 적극 지원하는 모양새만 갖추고 있는 형국으로 선거를 치렀다.

정종민  korea21c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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